넷플릭스에서 실험적인 영화를 공개했습니다. 블랙 미러라는 인터랙티브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 선택지가 나오고 보는 이의 선택에 따라 영화의 줄거리가 변하는 식입니다. 주인공 청년이 밴더스내치라는 게임북 (어릴 때 했던 만화 게임북 같은, 선택에 따라 페이지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소설로 보입니다)을 주제로 동명의 게임을 만든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데, 영화의 줄거리가 선택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좀 찾아보니 인터랙티브 영화는 생각보다 역사가 깁니다. 최초는 체코 Radúz Činčera 감독의 <Kinoautomat>로, 1967년에 공개되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영화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장르적 특성상 상업적인 영화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특히 다수가 함께 관람하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라면요. 어쨌든 시대는 변했고, 많은 사람들이 입력장치가 있는 기기들 - PC나 핸드폰, 태블릿 같은 것들 - 을 사용해 혼자(혹은 소규모로 모여) 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이제는 인터랙티브 영화를 위한 환경이 갖춰진 것 같습니다.
넷플릭스는 영상의 제작뿐만 아니라 이를 공개하는 플랫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만이 시도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든 셈입니다. 좋은 시도였어요. 블록버스터를 깨부수고 성공한 기업다운 진취적인 행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나 재미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번 영화는 시스템적으로 적어도 두 가지의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관객이 선택을 하기 위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선택에 따라 선택 이전의 과거가 변화한다는 점입니다.
보통의 영화에서 캐릭터들이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건 캐릭터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관객이 모르더라도 캐릭터들은 각자의 배경이 있고 성격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관객에게는 보여주지 않았을 지라도 모든 사건에는 맥락과 배경이 있죠. 그런 것들을 고려해서 캐릭터들은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그들은 영화 속 세계를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주인공의 판단을 가만히 바라볼 때는 좀 정보가 부족하더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겠거니 하면 되니까요. 그렇지만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우리는 결정하기 위해서 충분한 사전 정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영화 속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나 주인공의 목표나 뭐 그런 것들을 알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맥락 없는 순간순간의 결정이 될 뿐이고, 관객은 이야기에 몰입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영화 속 선택지 중 일부는 선택과 결과 사이의 맥락이 없습니다. 뜬금없이 게임 오버에 가까운 엔딩으로 직결되는 선택지가 있기도 하고 (영화의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데모였던 것 같습니다만, 글쎄요. 좋은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관객의 역할을 정확하게 정의하기도 전에 나를 드러내야 하는 선택지도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순간 마음 내키는 대로 결정을 내리게 되고, 이런 방식은 이 영화를 관객이 참여하는 것이 아닌, 이걸 누르면 어떻게 되나 하고 눌러보는 신기한 장난감 정도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래서야 체험도, 참여도 뭣도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좀 당황스러웠던 것은 선택에 따라 영화의 세계관이 변화한다는 점입니다. 관객의 선택에 따라 흑막이 드러나게 된다거나, 문제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거나, 음모를 알아내는 데 실패하고 중간에 주저앉게 된다거나 그런 멀티 엔딩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게 실제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아침밥을 먹기로 결심한다고 어제 본 시험 점수가 변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 영화에서는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내 선택에 따라 영화의 세계관이었던 '사실'이 변해요. 제가 영화 내용을 설명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스포일러도 못 해요. 이건 정성껏 영화를 보고 고민해서 선택지를 고른 관객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좀 화가 났습니다. 이번 영화는 넷플릭스가 자사의 플랫폼을 잘 이용한 좋은 시도였지만, 좋은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장르적 기법은 컴퓨터 게임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습니다. 여러 IP들을 라이센싱 해서 선택지 게임을 만들었던 텔테일 게임즈의 게임이 좋은 예입니다. 비주얼 노벨 장르의 수많은 게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발전해 오면서 게임 제작자들 사이에서는 나름의 디자인 룰도 생겼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연구해 봄직한 레퍼런스가 많이 있었을 텐데도 이런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좀 실망스럽습니다. 낯선 장르의 첫(?) 시도임을 고려하더라고 말입니다.
저는 항상 영화가 나아갈 방향은 관객의 참여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각(영상) 정보에 시간축(플롯)이 더해지면서 최초의 무성영화가 되었고, 거기에 청각 정보가 더해져 오늘날의 영화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중 한두 가지 차원이 강조될 수는 있었지만 영화는 그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무언가를 더하길 원할 테고, 저는 그걸 관객의 참여라고 봤습니다. 이번에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는데요, 관객의 참여가 생긴다면 (특히 그게 플롯에 영향을 주는 방식이라면) 그건 더 이상 영화가 아니라 새로운 장르로 보는 게 - 게임에 가깝겠지요 -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영화라는 장르에 기대하는 것은 벌어진(혹은 벌어질) 일을 '관찰' 하는 것이었다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덧 I. '인터랙티브'의 구현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터치 시네마, 리터칭 러브>에서는 캐릭터의 속마음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마 더 찾아보면 실험적인 시도가 많이 있었겠지요. 다양하고 참신한 시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영화는 좀 안일했어요.
덧 II. 이런 영화나 게임에서 선택지는 기본적으로 O, X로 설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총을 쏜다/안 쏜다. 악수를 한다/안 한다 같이요. 나는 컵을 깨고 싶지도 책상을 내려치고 싶지도 않은데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 건 좀 고역입니다. 주관식 상황에서 객관식 선택지가 주어지면 내가 영화를 주도하는 게 아니라 결국 영화에 끌려가는 기분이거든요.
궁금한 점. 우리나라는 게임을 출시하기 전에 게임물관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영화는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심의를 받겠지요. 블랙 미러는 영상물로 분류되어 심의를 받았을 것 같습니다. 게임으로 신고하고 심의를 받을 수도 있을까요? 텔테일 게임즈의 게임들을 생각하면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게임은 선택지의 선택 간격이 무한히 짧아지고 선택지가 무한히 많은, 그래서 선택 분기가 무한히 많은 인터랙티브 영화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켠다/끈다의 선택지밖에 없는 선택지가 하나뿐인 게임이 영화라든가.)
% 관심이 없어 잘 몰랐는데, 인터랙티브 무비는 많은 시도가 꾸준히 있었네요. 잘 정리가 되어 있는 PDF 문서가 있어서 링크를 걸어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