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동성애인과 함께 하는 'Co-habiting'
일반 대중을 많이 만나는 일을 하는 만큼, 가끔 색다른 조합의 사람들이 보이면 궁금증이 생긴다. 요크셔 풍 빵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칭칭 감은 중년의 남성과 밝은 핑크색 레인코트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카메라를 메고 다니는 중년 여성. 그 옆에는 20대 아시아인 남성이 한국식 반만 깐 머리를 하고 주변을 계속 설명하며, 비슷한 또래의 까만 뿔테 안경을 쓴 백인 남성이 세미 정장 차림으로 함께하고 있다. 이 풍경은 바로 부모님과 나, 그리고 나의 애인이다. 우리 넷은 맨체스터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생각했다. ‘사람들이 무슨 조합이라고 생각하려나?’ 물론 그들이 무엇을 상상하던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나의 부모님이 올해 4월 영국에 오셨다. 내가 이곳에 온 지 약 10개월 만에 이뤄진 가족 상봉이다. 그동안 통화나 메시지는 자주 주고받았지만 물리적 거리가 주는 애틋함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한국에서 부모님 집에 얹혀살 때는 그렇게 독립하고 싶다며 부르짖었건만, 부모님의 출국 날짜가 다가올수록 나는 설렘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작년 12월부터 부모님의 일정을 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작 2주 정도의 여행이지만 타인을 위해 여행지부터 호텔, 기차, 식당 등등을 다 찾아보는 건 여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를 위한 여행이라면 바로바로 결정할 수 있는 것들도 부모님과 시차를 맞춰 상의하려면 시간이 걸렸고, 단 시간에 돌아다니며 아무대서나 잘 수 있는 나와 달리 나이를 고려한 현실적인 계획도 필요했다. 그렇지만 부모님은 또 언제 영국에 올 지 모른다며 2주 내 최대한 많은 여행지를 넣었고, 여러 차례 실랑이 끝에 마침내 서로가 타협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 계획도 꽤나 무리였지만.
런던 - 요크 - 에든버러 - 인버네스 - 하이랜드 - 맨체스터 - 리버풀 - 런던
8개의 도시를 2주 만에 주파하는 일정.
사실 어머니의 경우 프리랜서로 일하시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운 반면, 일을 오래 비울 수 없는 아버지에겐 2주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래서 두 분 다 쉰이 넘으신 나이임에도 기차를 타고 다니며 영국을 한 바뀌 도는 이 여행 계획이 탄생했다. 더구나 나는 일 때문에 모든 여행지에 함께 할 수 없었고 몇몇 도시는 오로지 두 분의 힘으로 다니셔야 했으니, 조금 무모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3년 만의 해외여행은 두 분 사이의 모종의 열정을 깨워, 쉽진 않았지만 결국 다 해내셨다.
그래도 영국이라, 영어를 쓰는 나라라 조금 안심했던 것도 있다. 매서운 교육열을 자랑하는 한국에서 자라 영어가 유창하진 못해도 읽거나 의사표현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어머니는 일 년 전부터 EBS 팟캐스트를 통해 간단한 영어 표현을 익혀 오셨고 마침내 실전에서 써먹을 기회였다. 또 대화가 너무 안 통하면 번역기를 쓰면 되니까. 나는 갑자기 영어 실력을 늘릴 수는 없어도 부모님에게 지도 보는 법, 해외에서 인터넷 쓰는 법을 열심히 가르쳐 드렸다.
두 분의 하루가 끝나면 다양한 사진과 함께 무엇을 했는지 카톡이 날아왔다. 그중에서는 영국에 사는 나로서는 깜짝 놀랄 만한 일도 많았다. 모든 여행에는 실수담이 있는 법, 몇 가지를 여기서 풀자면.
* 입국한 날 비몽사몽으로 편의점에서 간편식을 산 부모님은 직원에게 포크를 달라고 요청했다. Fork가 아닌 Pork.
* 어머니가 직접 예약한 에든버러의 숙소는 시내가 아닌 골프장 근쳐였고, 30분씩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다.
* 영국 대표 음식인 피시 앤 칩스를 길거리 케밥 음식점에서 사드셨다.
* 스콘과 샌드위치의 나라인 영국에서 점심 때면 귀찮으셨는지 계속 미국식 도넛으로 끼니를 때우셨다.
부모님의 좌충우돌 여행기를 보자면 영국에 처음 왔을 때의 내가 생각났고, 어쩌면 아무것도 몰라 자꾸 실수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듯했다. '부모님을 내가 케어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이런 책임이 생기는 시기가 오고 있구나.
그래서 마침내 두 분이 맨체스터에 오셨을 때, 나는 영국의 전통음식과 문화를 보여드리겠다는 강렬한 의지에 불타올랐다. 이미 며칠 전부터 애인과 함께 어느 음식점에 갈지, 어디를 보여드릴지, 동선은 어떻게 할지 등 수많은 계획을 세운 후였다. 이미 여기 음식에 질려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중국식, 베트남식, 인도식 등 다양한 아시아 음식을 적재적소에 끼워놓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이제 나는 지도를 보지 않고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맨체스터가 익숙했다. 내가 일하는 매장에도 들어가 보고, 아주 오래된 도서관, 맨체스터 성당, 그리고 요즘 힙한 거리 등을 돌아다니며 그동안 쌓아온 영국 생활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보여드렸다. 내가 익숙한 곳이라 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모님의 안심시켜 드리고 싶었던 것 같다. 애인 역시 나와 함께 다니면서 부모님이 접해보지 못한 음식을 추천하고, ‘영국 사람들은 이래요’와 같은 궁금증을 속속들이 해결해 주었다. 애인이 나와 함께 있어준 것이 든든했고, 아마 부모님도 그렇게 느끼시는 듯했다.
영어가 안 되는 부모님과 한국어가 안 되는 애인 사이의 대화는 옆에서 보는 입장으로서 참 신기했다. 문장이 되지 않는 부모님의 짤막한 영어가 애인에게 통했고, 평소와 다름없는 속도로 말하는 애인의 영어가 부모님에게 통했다. 한국어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있기에 내가 부모님과 한국어로 대화하거나 이들이 서로 대화하는 내용도 얼추 알아듣는 듯했다. 무엇보다 서로 남이 아니니까, 내가 실수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무언에 작용해 더 가능했던 것일 수도.
새로운 나라에 온통 처음 보는 것 투성이인 부모님은 그간 영국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느끼며 궁금했던 것들을 애인에게 물어보았다. 그중에는 왜 항상 '땡큐'와 '쏘리'를 말하는지, 낮에도 펍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며 영국 사람들이 술을 많이 마시는지, 날씨가 원래 이렇게 오락가락하는지 등등. (이 내용들은 나중에 각각 글로 다룰 예정이다)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관찰하고 호기심을 보이는 부모님의 모습이 참 새롭게 느껴졌다.
부모님을 통해 스스로 반추하게 되는 나의 모습도 있었다. 좋은 것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나와 애인이 고민하고 의논할 때면, 다 괜찮다며 불쑥 결정을 내리는 모습. (성격이 급한 부모님은 애인의 꼼꼼함에 혀를 내두르실 정도였다.) 실수해도 금방 마음을 접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모습. 그리고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상황에 따라 양보하는 모습 등. 같이 있을 때는 몰랐지만, 그동안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배웠던 것 그리고 배울 점들이 눈에 속속들이 들어왔다.
오실 때와 마찬가지로, 두 분은 돌아갈 때도 용감하게 런던으로 알아서 가셨다. 처음 이 땅을 디뎠을 때의 불안함은 멀리하고 어느새 자신감으로 가득 찬 눈빛을 나는 보았다. 어머니는 프랜시스 호지슨의 책 <비밀의 정원>에서 주인공 메리가 영국의 강한 바람을 맞으며 오히려 더 건강해졌다고 말하는 그 대목을 이제야 이해하겠다고 말하셨다.
두 분의 여행이 끝나자마자 나에게 찾아온 바쁜 일상 때문에 함께였던 시간이 벌써 흐릿해졌다. 함께여서 좋았던 기억을 동력 삼아 나는 오늘 하루도 살아간다. 영국의 강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한 뼘 더 변화했을 내년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내년에는 내가 한국에 가서 부모님을 뵐 수 있기를. 매일매일 떡볶이를 먹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