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동성애인과 함께 하는 ‘Co-habiting’
영국에 온 지 일 년을 맞이한 나의 상태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가 가장 정확할 것이다. 흔히 낯선 곳에 가면 시간이 천천히 흐르지만 한번 익숙해지고 나면 금방 시간이 간다고 말한다. 처음 영국에 와서 겪었던 다양한 시행착오도 어느 시점이 되자 사라지고 나는 이곳의 언어, 문화, 그리고 동네에 적응하였다. 어느 시점부터 나는 일 년이 되는 날을 기다려 왔음에도, 막상 닥치니 이 사실이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미리 계획했다면 술자리를 만들거나, 회사 사람들에게 축하를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뭔가 새삼스러웠다. 특별한 날은 맞지만 그렇다고 내가 달라진 것 같진 않았다. 올해 들어 영국에서의 삶이 안정되고 나는 뭐랄까,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당연하지’와 같은 자신감이 생겼달까. 그래서 일 년이 되는 시점도 주목받기보다 그렇게 당연하게 넘기고 싶었던 것 일수도. 그리고 나는 주목받으면 온몸에 열이 나며 얼굴이 빨개진다.
그동안의 일 년을 되돌아보고자, 그리고 앞으로의 일 년을 상상해 보고자 이렇게 자판을 두드린다.
최근에 들어서 나는 한국에서 일을 그만두고 비행기에 올랐던 그 설렘, 영국에 막 도착해 처음부터 다 배워야 했던 답답함, 그리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느꼈던 두려움 등이 자꾸 생각난다. 그리고 ‘내가 이런 것을 다 지나왔구나’라는 안도감이 든다.
‘적응’이란 진짜 쉽지 않았다. 해외 생활이 처음도 아니고, 영어를 곧 잘하는 나인데도 일상의 작은 것들에 쉽게 긴장하고 이내 불평하였다. 당시 버스로 출퇴근을 했던 나는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 시간표와 민영화 정책으로 인해 버스마다 회사가 다르고 티켓이 다른 시스템, 그리고 에어컨이 없는 점에 분개했다. 회사에서도 분명 한국과 같은 이름의 회사이건만 소소하게 시스템이 다르고, 제대로 일처리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답답해했다. 그리고 점심밥도 따로 먹고 휴일에도 모이지 않는,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철저히 개인적인 회사 생활로 인해 친구를 사귀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저런 사소한 불만이 가득 쌓인 나는 매일 밤 떡볶이 먹으러 한국에 가고 싶다며 애인에게 하소연을 했고, ‘영국인인 네가 설명해 봐라’ 하는 식의 화풀이도 했었다.
그런 생활이 아마 작년 11월을 기점으로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셰어 하우스에서 개인 원룸으로 이사하며 출퇴근이 도보로 편해졌고, 플랫 메이트에 대한 스트레스도 사라졌다. 틈 날 때마다 리버풀, 버밍엄 등등 영국 이곳저곳을 여행했고, 영국 엑센트라도 웬만한 대화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출근할 때마다 “How are you?”라고 묻는 회사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나의 일상을 공유하게 되었고 (“이번 주말에는 그냥 쉬면서 요리해 먹었어” 등), 회사에서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선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주위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문화도 더 이상 아니꼬워 보이지 않았다. (사실 더 편했다. 나도 그만큼 덜 일해도 되니까) 이 밖에 마음 맞는 사람들을 여럿 알게 되어 쉬는 날 맥주를 마시거나 같이 어울려 놀았다. 이즈음 했던 심리상담에서도 상담가 분께 당당하게 “저 이제 적응 다 했어요”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때의 개운함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마치 세상에 대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영국 생활에 익숙해지며 나는 더 이상 ‘떡볶이 먹으러 한국 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이곳에서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더 탐구하는 자세가 되었다. 특히 부모님이 영국에 방문하신 시점을 계기로 지금까지 가보지 않았던 다양한 도시와 마을들을 둘러볼 수 있었고, 파이나 로스트 디너 등 영국 음식을 더 도전해 보았으며, 도서관이나 미술관 등을 다니고 책을 읽으며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집중하였다. 경험의 폭이 넓어질수록 이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습관, 인종, 언어 등이 보였고 나는 영국이 더 궁금해졌다. 더 나아가 ‘이런 사회라면 몸 담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말하는 이런 사회라는 건 어떻게 요약해 볼 수 있을까? 다양한 인종, 문화, 종교가 섞인 사회. 그런데 이것들이 충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으로 더 장려되고 각자가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사회. 일례로 이슬람교의 가장 큰 기념일 중 하나인 라마단은 영국 전역에서 행해지는데 이때 단식과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에 대한 전반적인 사회의 배려가 눈에 띄었다.
또 영국에서 개인은 뚜렷하고 분명한 개념이고, 각자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삶의 방식을 취하는지는 오로지 개인의 영역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눈치를 보며 살아왔던 한국인, 나에게는 취직은 어디로 해야 하고, 결혼은 언제 해야 하고, 집은 어떻게 사야 하는지 등의 사회적인 간섭 내지 잔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물론 영국 사회 안에서도 규범과 예의는 존재한다. 그리고 일 년 밖에 살지 않은 나로선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개인의 의사결정과 선택은 그 자체로 존중받고 축복되는 느낌이다. 이 밖에도 경쟁이 적고 크게 변하지 않는 사회이며, 성공보다는 조화와 안정이 장려되는 분위기이다.
그래서 나는 영국에 좀 더 오래 남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워홀 비자가 허가하는 2년이 지나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크다. 지금 회사가 비자 연장을 도와줄 수 있을지, 학생 신분으로 전환해 커리어의 변화를 도모할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결혼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맨체스터 말고도 살기 좋은 여러 도시가 있고 삶의 환경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햇빛이 더 들고 런던에 가까운 남쪽 도시는 어떨까? 아님 북쪽으로 더 올라가 스코틀랜드에 살면 어떨까? 괜스레 지도를 보고 있다.
영국에서 일 년을 잘 보낸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지금의 안정된 삶에 만족하는 동시에, 나는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다. 하반기에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2년이 다 채워진 시점에서 나는 어떤 경험을 해왔을지. 나는 두려우면서도 또 한차례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