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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외맛식혜 Apr 05. 2023

영국에서 비건으로 장보기

영국에서 동성애인과 함께하는 ‘Co-Habiting'

이전 한국 직장에서 도시락을 채소 반찬으로만 싸서 간 적이 있다. 불쑥 한 동료가 물었다. “베지테리언이에요?” “그게...” 나는 자신 없이 얼버무렸다. 비건인 지금의 애인을 만나고 나서 동물, 환경, 음식에 대한 나의 가치관은 참 많이 변화했다. 그전에는 비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조차 희박해서 애인에게 무례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5년 간 다큐멘터리, 뉴스 등의 영상 매체나 독서를 통해 비건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졌고, 이제는 애인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그리고 고통받은 생명체들을 보호하기 위해 꾸준히 실천해 나가고 있다.


한국에서 비건으로 살아가는 데에는 아직까지 큰 희생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곡물과 채소를 주식으로 하는 것이 한식의 매력 이것만, 웬만한 식당에서 고기나 생선이 배제된 음식을 찾기 힘들다. 인스타에서 핫한 카페에 가고 싶어도 유제품이나 계란이 포함된 빵과 음료가 가득하고, 마트에서 해 먹으려면 채소나 대체 육류의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 애인과 함께 살 당시에는 비건 식당과 카페를 주로 찾아다녔고, 드립 커피나 포카치야 처럼 그 자체로 비건인 음식들을 즐겼다. 그리고 한두 해가 지날수록 더 많은 채식 위주의 장소들이 생겨나는 것을 보며 소소한 기쁨을 누렸다.


영국은 비건에 대한 인식과 접근성이 굉장히 높다. 당장 웬만한 식당에 가도 베지테리언 혹은 비건을 위한 메뉴가 따로 준비되어 있고 대부분 카페에서 두유를 비롯한 대체 유제품을 취급하고 있다. (조금 더 비싸게 받는 곳이 있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지만) 특히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의 경우 한국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잘 되어 있는데, 보통 plant-based, meat-free, free-from이라는 표시와 함께 비건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구비되어 있는 종류도 스테이크, 베이컨부터 간편하게 데워먹을 수 있는 피자, 라자냐, 커리까지 굉장히 다양하다.


먹는 것에 항상 진심인 나의 애인은 슈퍼마켓 쇼핑을 가장 큰 취미로 삼고 있다. 영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가장 큰 체인 중 하나인 테스코(Tesco)를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한 것이 비건 코너 찾기였다. 어느 마트에서, 어느 브랜드에서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SNS를 통해 신속하게 정보를 파악하는 그답게 이미 어떤 게 맛있고 어떤 게 저렴한지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각 체인 마트마다 특색 있는 상품을 꾸준히 출시하는 것도 흥미롭다.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다양한 로스트 디너와 디저트가 비건으로 출시되었고 부활절을 앞둔 지금은 비건 양고기가 나올 거라는 예고가 있었다. 소소하지만 먹는 것을 즐기는 우리에게는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나와 그가 좋아하는 제품 몇 개를 소개해 보자면,


* Richnond 8 Meat Free Sausages (2.70 파운드) - 약간 짧지만 통통한 독일식 소시지가 연상되는데 진짜 고기가 구분이 안될 정도로 비슷하다.

* This Isn't Bacon Plant-Based Rashers (3.00 파운드) - 고기를 안 먹으면서 가장 그리웠던 게 베이컨인데 이 제품, 팬에 구우면 기름 튀는 것까지 유사하다.

* Tesco Plant Chef 2 Meat Free Steaks with Garlic Melt (2.65 파운드) - 테스코의 대표적인 자사 비건 라인이다. 비건인으로서 스테이크를 먹는 건 거의 상상하지 못했는데 오븐에 높은 온도로 구운 뒤 팬에으로 마무리하면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된다.

* Linda McCartney Vegetarian Hoisin Duck Meal Kit (5.00 파운드) - 비틀스의 멤버 폴 매카트니의 아내 린다 매카트니의 브랜드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첫 번째 비건 브랜드라고 알려져 있다. 약한 불로 팬에 볶은 후 달착지근한 소스와 싱싱한 오이를 함께 넣어 싸 먹으면 베이징덕 저리 가라 할 정도이다.

* Hellmann's Vegan Mayonnaise (2.60 파운드) - 마요네즈에도 계란이 들어가 비건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점차 콩으로 만든 마요네즈가 나오고 있는데 이 제품은 베이컨 맛을 가미한 것이 특징. 먹고 나면 입 안에 강한 향이 남는 것은 단점일 수도?

* Wicked Kitchen 5 Bakewell Slices (2.40 파운드) - 라즈베리와 아몬드가 콕콕 박힌 디저트. 윗부분은 부드러운데 아래는 바삭해서 행복한 조합을 선사한다.

* Ben &  Jerry's Sundae Berry Revolutionary Non Dairy (4.80 파운드) - 한국에서도 아이스크림 신흥 강자로 유명한 밴엔제리의 비건 아이스크림. 초코칩을 워낙 좋아하는 데다가 캐러멜, 오래오, 라즈베리까지 섞어있어서 절대 마다할 수 없는 최애템이다.


이쯤에서 영국의 슈퍼마켓 지형도를 잠깐 짚고 넘어가자. 애인이 마트에도 급이 있다고 설명해 잠시 웃었던 기억이 있는데, 어느 정도 사실이다. 90프로 이상이 자사 제품으로 채워져 낮은 가격대를 유지하는 Aldi와 Lidl이 있고, 좀 더 다양한 구성을 확보한 Asda, Tesco, Morrisons, Sainsbury's가 있다. 우리로 따지면 이마트나 홈플러스처럼 가장 대중적인 브랜드가 되겠다. 그 위로 좀 더 세련된 M&S Food (확연히 백화점 식품관과 닮은 구석이 있다), 그리고 최상단에는 Waitrose, Booths가 자리 잡고 있다.


토마토 하나를 사더라도 슈퍼마켓마다 가격 차이가 상당하게 때문에,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우리는 식재료는 알디(Aldi), 가공품은 테스코(Tesco)로 나눠서 장을 본다. 무엇을 어디서 살지 촘촘하게 동선을 짜서 장을 보는 게 마냥 귀찮으면서도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이런 슈퍼마켓 등급은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는지, 맨체스터 도심에서 웨이트로스(Waitrose)나 부스(Booths)를 본 적이 없고, 차를 타고 외곽으로 나갔을 때 비로소 딱 한번 찾아볼 수 있었다.


맛있는 게 먹고 싶지만 비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알디(Aldi) 제품들의 평이한 맛에 지쳐 테스코(Tesco)를 방문하는 나의 심정이 딱 그러하다. 오랜만에 브랜드에서 만든 맛있는 비건 라자냐를 먹고 싶다가도 가격에 놀라 망설여질 때, 나는 세일코너로 발길을 옮긴다. 영국에서는 보통 'Reduce to clear'라고 불리는 데 직역하자면 ‘유통기한 세일’ 정도가 되지 않을까. 없애야 해서 싸게 판다는 문구만큼 유통기한에 임박한 제품들이 대부분이며 50프로 이상 할인가에 판다. 맛있는 제품을 싸게 살 수 있어 좋지만 그만큼 빨리 먹지 않으면 상하기 때문에 당일 저녁이나 다음날 점심으로 활용되곤 한다. 그날만큼은 점심이 기다려진다.  


외식비가 비싼 영국의 특성 때문에 삼시 세끼를 집에서 해결하는 우리에게 장보기는 일종의 책무이자 놀이 같다. 이번주에는 뭐 먹을지 막막하다가도 마트에서 뜻밖의 신제품이나 할인 소식을 접하면 짜릿한 기분마저 든다. 오늘도 우리의 장보기 스킬은 또 향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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