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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외맛식혜 Mar 31. 2023

나의 일주일 시골 살이

영국에서 동성애인과 함께하는 ‘Co-habiting'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20년 이상 도시가 주는 활력과 새로움을 쫓아다녔다. 요즘 핫한 카페, 사람들이 줄 선 팝업스토어, 신진 작가의 전시 등을 혼자 혹은 친구들과 누비며 항상 변화하는 이곳을 사랑했다. 대도시가 아니면 못 산다는 안일한 생각도 종종 했었다. 그러다 문뜩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 쨍한 햇빛을 맞이할 때, 그대로 털썩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었다. '흙을 밝고 나무의 푸르름을 본 게 마지막으로 언제였지?'


나는 영국에 도착한 직후 일주일 동안 애인과 부모님이 살고 계신 스킵튼(Skipton)에 머물렀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들판. 양 때가 풀을 뜯어먹는 모습. 어디를 가던 햇빛이 기분 좋게 내려쫴고 각자의 속도에 맞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 그동안 쉴 틈 없던 나의 일상에 잠시 쉼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한국에 같이 살던 당시 애인은 항상 자기 고향이 아무것도 없는 동네라고 얘기하곤 했다. 평생을 지낸 곳에 별 감흥이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그의 말과는 달리 스킵튼은 나름 영국 내에서 알려진 관광지이다. 영국의 어느 동네와 마찬가지로, 중앙에 큰길 하나가 있고 그 길을 따라 카페, 펍, 우체국 등이 줄지어 나아 있다. 토요일 이른 오후, 나는 홀로 동네를 나섰다. 날씨는 흐리지만 타운 피플들은 삼삼오오 모여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나는 첫 행선지인 스킵튼 캐슬(Skipton Castle)로 발걸음을 옮겼다.


1090년 로버트 경에 의해 지어진 이곳은 마을 그 어디에서도 이정표를 찾을 수 있을 만큼 여행객들이 찾는 장소이다. 둥근 타워 두 개가 연결된 형태의 정문을 지나면 푸른 초원과 함께 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건물들이 보인다. 백발의 직원 분이 나의 티켓을 확인하며 친정하지만 동시에 당찬 목소리로 지도에 나온 관람 순서를 설명해 주셨다. 바로 이 자리에서 오랜 세월 여행객을 마주하며 고성에 대한 열정을 나누었을 그의 모습이 쉽게 상상되었다. 오래된 벽돌에 손을 대보기도 하고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을 떠올려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런던(London)이나 요크(York)처럼 붐비는 관광지가 아니라서 동선을 이탈해도, 시간이 지나버려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제 성곽을 따라 위로 올라가 보자. 이 길을 따라 5분 정도 올라갔을까? 성곽이 끝나는 지점에  스킵튼 우드(Skipton Woods)라는 표지판이 보이며 작은 샛길이 나왔다. 고성 뒤로 드넓게 펼쳐져 있는 이 숲에서 나는 정갈하게 다듬어진 풀과 나무가 아닌, 원래 그대로를 간직한 자연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혹은 반려견을 이끌고 자연을 누비는 영국 사람들로부터 무언의 에너지를 느꼈다  이런 풍경이 가능한 데에는 지리적 요인이 크다. 북잉글랜드 중에서도 북 요크셔(North Yorkshire)에 위치한 스킵튼은 고지대, 숲, 드넓은 초원으로 둘러 쌓여 있다. 영국 시골 마을을 떠올렸을 때 양 때가 풀을 뜯는 초원이 생각난다면 꼭 요크셔 지방을 둘러보시길. 숲 속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 보니 복잡한 생각과 마음이 어느새 조용해졌다.   


양과 눈이 마주쳤다

이제 마을 남쪽으로 내려가보자. 스킵튼의 또 하나의 자랑은 바로 스킵튼 운하(Skipton Canal)이다. 요크셔의 가장 큰 도시 리즈(Leeds)와 항구 도시 리버풀(Liverpool)을 잇는 운하가 나아 있는데, 18세기 영국의 산업 혁명 시절 주요 물자를 운반하는 주된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현재는 그 빈자리를 개성 있는 보트들이 채우고 있으며 직접 보트에 올라 운하를 체험할 수도 있다. 15분 정도면 다 둘러볼 수 있는 작은 규모이지만 그 길을 산책하는 사람들을 따라 나도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물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종종 새들이 그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뜻밖에 주어진 이 일주일이 결코 평화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당시 나는 회사와 계약서를 조율하는 상황이었고 더뎌지는 일처리 때문에 상사가 언제 연락을 해올 지 몰라 강박적으로 핸드폰만 쳐다보았다. 애인 역시 이미 몇 주 동안 둘이 함께 살 집을 찾았지만 맨체스터 내에 마땅한 곳이 없어 매우 지쳐있었다. 하지만 애인과 함께 동네룰 돌아다니며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슈퍼마켓에서 새로운 식재료를 구경하고, 집에 딸린 작은 정원을 하염없이 쳐다보던 그 순간을 은 매우 행복했다. ‘내가 이렇게 쉬어 본 적이 언제지?’ 새로운 공간에서 오롯이 나로서 존재했다.


일전 만난 적이 있는 애인의 부모님이지만 그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흥미로웠다. 영국이 낯설 나를 위해 말을 걸어주시는 애인의 부모님. 수년 만에 보는 거라 어색해하면서도 그 속에 친절함이 묻어있었다. 우리의 관계에 대해, 나의 미래에 대한 질문 대신 내가 지금 편안한지, 하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보셨다. 나에게 어떠한 기대나 바람도 없이 그냥 한 개인으로 바라봐주었다. 애인과 그의 어머니, 아버지 사이에는 항상 언쟁이 오가는 데, 내가 걱정되어 괜찮은지 물어보면 항상 “원래 그래”라며 쿨 하게 대답했다. 서로 솔직한 만큼 뒤끝 없는 가족의 풍경이었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부끄러움이 많아 방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셨고, 아버지는 요크셔 지방 사투리를 가득 섞어 한참을 말하다가도 내가 못 알아듣는 것을 알아채고 몇몇 단어를 바꿔서 말해주셨다. 그들의 배려에 진솔함이 느껴졌고 혼자라는 걸 느낄 틈도 없이 따듯한 시간을 보냈다.


요즘은 나와 애인은 가끔 스킵튼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내 마음속에 또 다른 고향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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