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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이라는 등불

익숙함 속에서 잊고 지냈던, 처음 그 마음을 다시 꺼내보다

by 주진주

오늘 아침, 업무를 시작하려고 컴퓨터를 켰다가 문득 손이 멈췄습니다. 자꾸만 눈에 밟히던 구글 포토 알림을 눌러보았더니, 작년 이맘때의 사진들이 자동으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몇 장의 사진을 넘기다 보니, 지난 10년의 시간들이 조용히 제 앞에 펼쳐졌습니다.

처음 어떤 일을 시작하던 날, 어색하지만 설렘 가득한 얼굴. 밤늦게까지 혼자 사무실에 남아 무엇인가에 몰두하던 모습. 친구들과 나눴던 조촐한 축하, 그리고 예상치 못한 실패 앞에서 허탈하던 마음까지. 사진 속의 저는 지금보다 훨씬 덜 능숙했지만, 훨씬 더 선명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왜 이 일을 시작했을까?"

사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일이 익숙해질수록 성과와 효율이 중요한 가치가 되기 시작하면서, 처음의 마음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그저 ‘해야 하니까’ 하게 되고, ‘해야만 하니까’ 계속하게 되는 순간들이 쌓이다 보면, 우리는 처음 품었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 그 잊고 지냈던 마음이 사진 속에서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두 눈을 반짝이며 ‘한번 해보자’고 다짐하던 그 시절의 저를 보며,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의 그 마음, 그 간절함, 그 두려움 속의 용기. 그것이 바로 초심이겠지요.

초심은 단지 ‘처음의 설렘’이 아닙니다. 그것은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이 길을 왜 선택했는지를 알려주는 삶의 나침반입니다. 하지만 그 나침반은 자주 흐려집니다. 현실은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가고, 사람은 쉽게 지치며, 결과는 언제나 뜻대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초심을 ‘잃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초심을 지킨다는 것이 늘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열정은 점점 현실적인 계산으로 바뀌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도 받습니다. ‘왜 시작했는지’보다는 ‘어떻게 버틸 것인지’가 더 중요해지는 시기가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심은 여전히 우리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제가 다시 꺼내본 사진들 속에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어설픔, 그리고 실패조차도 나를 더 진실하게 만들어주었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 모든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고, 그 모든 감정이 있었기에 지금도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초심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초심 그대로’ 머무르겠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흔들릴 때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자리를 갖는 일입니다. 실수해도 괜찮고, 때로는 길을 잃어도 괜찮습니다. 다만, 다시 돌아올 마음속의 ‘첫 시작’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누군가는 초심이란 이상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현실은 냉정하고, 세상은 쉽지 않다고요. 맞는 말입니다. 저 역시 그 현실 속을 살아가고 있고, 매일같이 현실적인 문제들 앞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초심이라는 단어는 저에게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그건 마치 힘들고 어두운 길을 걸을 때 주머니 속에서 꺼내보는 작은 손전등 같은 것입니다. 비록 멀리까지 비춰주지는 못하지만, 지금 내 발 앞을 조금은 따뜻하게 밝혀줄 수 있는 그런 불빛이요.

속도가 느려도 괜찮습니다. 남들보다 늦더라도 괜찮습니다. 가끔 멈춰서 숨을 고르고, 마음속의 나침반을 다시 꺼내보는 일. 그것이 우리가 길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하루, 저는 그 나침반을 다시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의 마음. 그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그 마음 하나로 계속 나아가고 싶습니다. 비록 세상의 속도와 방향은 늘 바뀌겠지만, 제 마음속 등불은 초심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빛나고 있을 것입니다.

그 빛이 꺼지지 않기를,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의 어두운 길을 비춰줄 수 있기를 바라며, 다시 하루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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