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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떠난 허니문

첫 유럽여행을 혼자?

by Pearl K

-어차피 결혼하기는 글렀으니까, 남들은 허니문으로 가는 유럽. 나 혼자라도 가야겠어.
-좋은 생각이네.


너무도 지쳐 있었다. 13년간의 직장생활 끝에 남은 건 고장난 몸뚱아리와 집 나간지 오래되어 돌아오지 않는 멘탈,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 뿐이었다.

상급기관 담당팀장의 갑질로 인해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아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접수했다. 결국 사과는 받아냈지만, 싸우는 과정에서 나 역시 엄청난 내상을 입어야만 했다.

황금연휴에 속초에 바다를 보러 갔다가 배가 찢어질 듯 아파 예정보다 빠르게 일정을 접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저히 고통을 참기 힘들어 제 발로 응급실을 찾았다. 4일간의 입원과 물도 못 먹는 강제금식 끝에 얻은 결론은 위궤양과 십이지장궤양이었다. CT사진 속에서 보이는 위와 십이지장 총 일곱 군데가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진짜 휴식이 필요했다. '인생 뭐 있나. 질러버려. 돈은 원래 지르고 갚는 거야.' 휴일을 끼고 연차를 끌어모아 7박 9일의 일정으로 무작정 비행기표를 질렀다.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인 바츨라프 하벨 공항에서 내린 시간은 오후 1시 30분이었다. 수속을 마치고 픽업 나온 차를 타고 호텔로 향하는 길, 눈 앞에 펼쳐진 간판에는 처음 보는 언어들이 적혀 있었다. 이곳은 동유럽의 도시 중 가장 물가가 저렴한 도시인 프라하다.


미리 환전해 간 CZK(체코 코루나)는 프라하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체코에서도 Euro(유로)를 쓰지만 이어서 갈 다른 나라에서 유로를 사용하려면 아껴야 했다. 이번 여행은 7박 9일 동안 체코의 프라하를 시작으로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거쳐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처음엔 혼자서 츌발하려 했으나 예상치 못한 동행자가 생걌다. 같은 일을 하는 동료 선생님이었다. 숙소를 중시하는 동행자 덕분에 우리가 3일간 묵을 숙소는 프라하 나 포르치지 거리에 있는 5성급 호텔이다. 공항에서 호텔까지의 거리가 꽤 멀다. 픽업 나온 차로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후, 대강 짐을 풀어두고 나니 어느새 오후 3시가 넘었다.


도착하자마자 호텔 리셉션에서 약간의 실갱이가 있었다.트윈베드를 준다고 해놓고 정작 방에 가보니, 더블베드였던 것이다. 우리가 리셉션에서 트윈베드인지를 몇 번 확인했는데, 그렇다고 대답하더니 무려 5성급 호텔의 성의없는 응대에 기분이 확 상했다.


시간이 늦어 첫날은 호텔 1층 바로 옆 버거 가게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고, 낯선 도시의 밤거리를-겨우 호텔 주변 정도였지만, 걸어서 둘러보는 것으로 첫째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둘째날 아침부터는 조식을 든든히 먹고 본격적인 프라하 탐험에 나섰다. 첫 번째 목적지는 프라하 성과 성 비투스 대성당이다. 트램을 타고 프라하 성 근처에 내려 걸어올라 가는데, 오르막이 왜 이렇게 힘든 건지 그동안 운동 한 번 안하고 살았던 게 너무 티가 난다. 다들 쉽게 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오르막을 혼자만 헉헉거리며 프라하 성으로 올라갔다.


성으로 가는 오르막 길의 중간중간 버스킹을 하는 악사들이 보인다. 세계 여러나라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로 떠들어대며 성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여행객들이어서 그런지 모든 얼굴이 아주 밝다. 그 와중에 날씨는 동유럽에 30여년만에 찾아온 이상기온으로 8월 여름 한낮의 기온이 37도가 넘었다.


한국의 고온다습한 기후에는 맥을 못 추던 나는 희한하게도 유럽의 고온건조한 기후에는 아주 잘 적응하고 있었다. 습하지 않으니 피부상태도 좋고, 고온으로 등이 좀 뜨거운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또 7시간 정도 시차가 있어 어지럽거나 졸릴까 봐 걱정했는데, 너무 잘 적응해서 신기할 정도였다. 동행자는 고온도 더위도 시차도 적응을 못해 몹시 힘들어 했다.


육안으로는 끝까지 잘 보이지도 않는 프라하성과 성 비투스 대성당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바닥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해서 사진을 찍었다. 인물사진은 찍지 않고 풍경만을 담느라 정신없는 나와는 달리, 동행자는 여러 풍경들 앞에서 셀카를 찍느라 정신이 없다. 우리, 참 다르다.


두번째 목적지는 강 건너에 있는 지은지 천 년이나 되었다는 스트라호프 수도원이다. 영화 <장미의 이름>에 나온 것과 같은 도서관이 있다고 해서 일부러 찾아갔다. 유럽까지 가서 왜 도서관을 가냐고 하면 직업병이 아니라 그저 도서관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해외 여행을 가면 꼭 그 나라의 도서관을 들르는 편이다. 물론 사서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닌 듯 하다.


아뿔싸! 가는 날이 장날이다. 하필이면 올해부터 천년돤 수도원의 도서관은 보수공사 중이라고 했다. 보수공사로 도서관 입장 자체가 안 된다고 해서 스트라호프 수도원과 부속 정원만 바깥에서 겨우 구경할 수 있었다.


아쉬움을 안고 스트라호프 수도원에서 내려오는 혹은 올라가는 길, 뒤를 돌아보니 구름이 걸린 하늘 아래 붉은 색 계열과 주황색 계열의 지붕들이 예쁘게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다. '프라하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의 배경이 바로 여기였구나.'하는 깨달음이 생겼다.


스트라호프 수도원 바로 아래, 가장 뷰가 좋은 곳에 레스토랑이 있었다. 따끈한 굴라쉬와 짭쪼름한 파스타를 점심으로 먹으며 지친 다리를 쉬어 가기로 했다. 오후에는 대사관이 모여 있는 네루도바 거리와 유명한 쇼핑 거리들을 구경하기로 했기 때문에, 휴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한국에서는 그냥 주는 마시는 물도, 프라하에선 Tap water를 줄 수 있냐고 조심스레 물어봐야 했다. 안 된다고 하면 비용을 지불하고 따로 물을 주문해야 하고, 화장실 이용료도 매번 2유로씩 내야했다. 이런 생경한 일들에 익숙해지기엔 출발한지 만 이틀도 채 안 된 때라 아직 몹시도 낯설었다. 게다가 내겐 생애 첫 유럽이었다.


스트라호프 수도원 아래 하늘과 가장 가까운 레스토랑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이 눈부셨다. 알록달록한 지붕들이 낯설어서 눈으로만 보기엔 아까웠다. 사진으로 담으려 했지만 눈으로 보는 것만큼의 느낌이 나지 않아 아쉬웠다.


그렇게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역설적이게도 떠나온 집이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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