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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홍당무와 버스의 여신님

두 여자의 3박 4일

by Pearl K

느릿느릿 도착한 버스에서 내린 우릴 맨 처음 반겨준 건, 윙크하는 스마일 간판을 단 건너편의 알뜰주유소였다.

지난 유럽여행의 실패 이후 누군가와 같이 여행을 가는 건 두 번 다시 하지 않으려 했었다. 같이 제주도에 가자는 제안을 먼저 해온 건 은지 샘이었다.


왠지 우리는 잘 맞을 것 같다며, 내 여행 스타일을 묻더니 자기도 말없이 걷는 걸, 음악을 듣는 걸, 끼니는 꼭 챙겨 먹는 걸, 예쁜 카페에 가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살포시 기대감이 올라왔다.




한적한 겨울방학 중에서도 봄에 가까운 어느 날로 날짜를 맞추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제주스러운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고 나서 두근대며 그날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당일. 새벽같이 일어나 김포공항에 빠르게 도착했다. 약속시간까진 아직 40분이나 남아있었다.

여행 가는 마음은 다 같은지, 혹시나 해서 연락해 보니 은지 샘도 이미 공항이었다. 일찌감치 티켓팅을 하고 여유 있게 비행기 탑승을 준비했다. 의자에 앉자마자 잠깐 잠들었는데 어느새 도착한 제주도. 서울과는 다른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가 저절로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같이 간 은지 샘은 일명 "버스의 여신님"이었다. 신기하게도 과 함께 가면 정류장에서 기다린 지 5분 이내로 우리가 타려고 하는 버스가 도착했다. 그 당시 제주의 버스는 최소 대기시간이 20분이었다. 중산간에 가는 버스는 1시간에 1대만 다니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제주에 갈 때마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최소 1시간 이상으로 길었기에 일정을 아주 여유 있게 잡았다. 애초에 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슬로라이프를 즐기기로 했었다. 신기하게도 은지 샘과 함께라면 콜택시보다 더 빠르게 원하는 목적지를 다닐 수 있었다.

덕분에 원래 짰던 일정에 비해 시간을 넉넉히 쓸 수 있었다. 남은 시간으로 좋아하는 것을 하고, 좋아하는 풍경을 더 길게 보고, 맛있는 것을 오래 음미하며 먹고, 예쁜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더 길게 누릴 수 있었다.


함께 갔던 숙소도 좋았다. 제주 전통 돌담집에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친언니 같은 당부들 가득했던 칠판. 투숙객들의 손글씨로 채워진 두툼한 방명록과 게스트하우스를 지키는 고양이 한 마리.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2인실에, 여성전용이어서 더 좋았다. 샤워실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식겁했던 걸 빼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깨끗하게 새로 세팅된 침대에서 푹 자고 일어난 후의 조식은 와플팬으로 구운 식빵 2조각과 샐러드, 과일, 커피였다. 근처 갈만한 곳을 질문하자 까칠해 보이던 미쓰 홍당무의 사장 언니는 세상 친절하게 조곤조곤 답변해 주셨다. 덕분에 우리는 즐거운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겨울의 제주는 고요하다 그래서 때로 멈춘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모든 것이 잠잠하고 조용해 보이던 평대리의 첫인상을 기억한다. 어쩌면 새롭게 다가올 봄을 준비하기 위해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곧 봄이 오고 온 천지가 만발하게 유채꽃이 필 테니까. 그때를 위해 체력을 비축해 두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지난 한 해 동안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또 새로운 한 해를 절반 이상 보냈다. 아직 내가 기다리는 봄은 오지 않았다. 언제까지 봄을 기다려야 할지 때로 자신이 없어진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조금 멈추어 있게 되더라도 다시 용기를 내고 싶다. 새롭게 다가올 내 인생의 봄을 기대하며, 필요한 체력을 비축하고, 첫 마음을 회복하여,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제 곧, 봄이 올 테니까.



#여행 #기억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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