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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무지개가 뜰 거다

지금은 흐려도, 빗속을 걸어도

by Pearl K

복직하고 꼬박 10개월 동안 제대로 된 쉼을 갖지 못했다. 휴직으로 근무를 하지 않았으니, 연차가 없다고 했다. 휴직기간 내내 병원만 쫓아다녀야 했던 터라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절차상 규정들이 머리로는 이해 가지만, 무언가를 빼앗긴 것처럼 서운하기도 했다.


2학기 들어오면서 생긴 대체공휴일로, 드디어 휴가다운 휴가를 준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평소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는 나다. 원래대로라면 굉장히 신나야 하는데, 내 기분은 한없이 착 가라앉은 그대로였다.


옆자리의 짝꿍에게 괜히 승질을 부려보기도 했다. 당신이 내가 계획을 좋아한다고 여행장소며 계획이며 일정을 다 짜라고 매번 시키니 힘들다고 말이다. 신랑은 큰 눈을 끔뻑이며 '좋아해서 하라고 하는 건데.."하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쉴 틈도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나도 지금 너무 지쳤어. 누가 계획 다 짜고 나는 몸만 가면 되는 거. 그런 거 가고 싶다고." 대신 여행 계획을 짜 줄 사람도, 내 입맛에 맞게 여행 장소를 결정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착착 다 정리해줄 사람도 없어 결국 또 모든 여정을 홀로 준비했다.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 아침, 서둘러 예배를 드리고, 강아지를 호텔에 맡기고 와서, 우리 짐을 정리하고 간단히 아점을 먹었다. 혼자 한없이 느긋한 남편을 재촉해서, 버스를 타고 4시간 만에 1차 목적지에 도착했다. 렌터카를 받아서 운전하여 간 곳은 절벽 위에 바다를 내려다보는 고즈넉한 정자가 지어진 곳이었다.

종일 비가 내린다는 예보는 들었지만 집을 떠날 때부터 시작된 빗줄기는 우리가 버스를 타고 지역을 이동하고, 렌터카를 다시 타고 내려 걸어서 바다 앞으로 이동할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계속 내렸다. 마침 절벽 위 정자는 공사 중이어서 바다로 난 길을 따라 우산을 받치고 돌길과 나무데크길로 걸어갔다.


잔뜩 구겨진 마음으로 마지막 남은 나무데크의 계단을 내려가는데 바다 위로 파도가 하얗게 부서졌다.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때 뒤따라 오던 남편이 외쳤다. "저기 봐. 무지개다."

정말이었다. 바다 끝에서부터 계단을 타고 올라가듯 빗속에서 무지개가 서서히 진해지고 있었다. 무지개가 진해질수록 빗방울은 옅어졌다. 마침내 비가 그쳤고, 무지개는 우리에게 온전한 그 자태를 드러내 보여주었다.


비가 계속 와서 우중충했던 날씨였는데, 그냥 다 취소할까 고민했을 만큼 의욕이 없었는데 여행지의 첫 장소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무지개를 만났다. 하루 종일 세찬 비바람과 잔뜩 흐린 하늘에 희망이라곤 없었는데, 아직 희망이 남아있다고 좀 더 용기를 내도 된다고, 하늘로부터 응원을 받은 것 같다.


빗소리만 가득하고 하늘은 잔뜩 흐려 구름으로 뒤덮여 있는 인생에도, 구름 뒤를 들춰보면 여전히 푸른 하늘이 숨어 있다. 비가 그칠 때가 가까워지면 언젠가 무지개가 뜰 거다. 처음엔 조금 흐려서 잘 안 보여도, 점점 제 색을 진하게 내는 무지개가 하늘 높이 뜨겠지.


지금은 흐려도, 빗속을 걸어도, 구름 밖에 안 보여도, 파란 하늘과 무지개를 만날 수 있을 날을 위해 조금 더 애써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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