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도 분리수거가 되나요

생각보다 삶

by Pearl K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르지 않고 매주 어김없이 돌아오는 날이 있다.

쌓여있던 무거운 짐들이 가벼워지고, 정돈하지 못했던 것들을 정돈할 수 있는 날, 바로 분리수거 하는 날이다.

택배 서비스가 일상화된 것이 20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다. 거기에 바쁜 현대사회와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는 상황과 맞물려 생필품이나 식품배달 서비스가 생겨나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일반 택배배송 외에도 쓱 배송, 새벽배송, 샛별배송, 퇴근길 배송 다양한 이름으로 특화된 배송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코로나19로 인해 점점 그 규모가 더 커지고 세분화되고 있다.

이렇게 모든 생필품과 식료품, 각종 물품들을 배달받으면서 생겨난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쓰레기 분리수거 문제다. 택배포장으로 오는 종이박스, 비닐, 각종 플라스틱, 스티로폼, 뽁뽁이, 아이스팩까지 부피가 큰 버려야 할 것들이 계속해서 쌓인다.

결혼 직후 첫 신혼집을 꾸밀 때 택배로 정말 수많은 물건들을 주문했다. 커다란 가구부터 자잘한 생필품들까지. 그렇게 며칠 쏟아지는 택배를 받고 나면 분리수거 해야 할 박스를 비롯한 재활용품들이 넘치다 못해 방 하나를 차지할 정도였다.

아파트마다 다르겠지만 분리수거일이 아예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로 지정된 경우가 많다. 우리 아파트의 경우는 월요일이 그 날이다. 화요일부터 버려야 할 재활용품들이 쌓여가면 점점 마음이 답답해진다. 드디어 일주일이 지나고, 분리수거일에 다 꺼내어 재활용품들을 깨끗이 버리고 나면 속이 개비스콘 급으로 후련해진다.



내 삶에도 이런 분리수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필요없는 포장지는 잘 뜯어서 정리해 두고, 쓰지 않는 플라스틱과 스티로폼은 모아서 재활용하는 것.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라는 책을 우연히 읽게 되면서 내 감정의 분리수거가 시급함을 깨닫게 되었다.

아주 예전에 MMPI 검사를 했을 때, 상담을 해 준 언니가 그랬다. 지금 나의 감정상태는 이미 분노게이지가 아슬아슬하게 끝까지 차 있다고. 그래서 니가 조그만 자극에도 금방 뚜껑이 열리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이거 레알 반박 불가다.

기분이 좋고 상황이 좋을 때는 한없이 긍정적인 사람처럼 행동하는데, 어떤 일이 있을 때, 내가 얼마나 감정에 잘 휘둘리는 사람인지 나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박스를 분리수거하듯 내 감정도 분리수거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치고 여유가 없으면 감정이 쌓이고 쌓여 폭발하게 되는데, 막상 화는 내지 못하고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한동안 자각이 없다가 조금 여유가 생기면 그동안 얼마나 간당간당하게 버티고 있었는지를 또 깨닫게 된다.

몇 년 전 상담을 할 때, 제게 우울증이나 감정적 문제가 있지 않냐는 질문에 상담샘이 대답해 주신 게 충격이었다. 내가 겪는 감정은 일반적인 것인데 전반적으로 내가 감정을 과잉하여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이다. 되도록 평상심을 유지하고 별 것 아닌 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라고 하셨다.

재활용품을 정리해두듯 내 감정도 차곡차곡 잘 정돈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정돈은 하되 감정에 너무 몰입되어 있지는 말아야겠다. 다행히 짝꿍이 그런 감정표현에 무던한 편이다. 과장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그때그때 감정을 잘 해소할 방법을 찾아보아야 겠다.



부지런하고 엉덩이가 가벼운 짝꿍을 만나서, 그때 그때 들고 나가기 쉽게 재활용품을 정리해 두니까 심리적 부담이 훨씬 덜하다. 월요일마다 양손 가득 재활용품을 들고 강아지도 산책시킬 겸 분리수거를 하러 간다.

후련하게 어제의 분리수거를 마쳤다. 내 감정의 분리수거도 이렇게 깔끔하게 해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이번 주에 새로 올 여러 가지 택배도, 앞으로의 인생에 다가올 새로운 관계도 즐겁게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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