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준비하지 못했을 때

분명한 그녀

by Pearl K

며칠 전, 자동차 계기판에 주황색 주유표시등이 들어왔다.

지난 3년 동안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불이다. 기름 잔고가 한 칸 정도 남았을 때 미리미리 늦지 않게 주유를 하러 갔었기 때문이다.


퇴근길에 차에 뜬 주황색 주유표시등을 보면서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심지어 주행가능거리도 표시가 안 되기 시작했다. 주유소에 가기 전에 차가 갑자기 길에서 멈추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좀 더 일찍 대비하고 준비하지 않았던 스스로를 탓하기도 했다.

무사히 주유소에 도착해서 기름보충을 마치고 주유표시등이 꺼지고 난 후,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그러다 생각했다. 깜빡이는 주유표시등이 떴을 때 내가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를. 대비하지 못한 갑작스런 위기가 닥쳤을 때 나에게 제대로 된 대처능력이 있을까.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렇듯 뜻밖의 위기를 만나게 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주어지는 그 위기 앞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동안 든든히 서 있다고 생각했던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말이다.

넷플릭스에서 시즌3까지 방영 후 종결된 덴마크 드라마 'The Rain'은 비에 섞여 내린 바이러스로 인해 갑작스럽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그 비가 오기 직전 어린 시모네와 남동생 라스무스는 아빠에 의해 지하벙커로 들어가게 된다.

누나인 시모네가 남동생 라스무스를 돌보면서 아빠가 정해준 대로 무려 6년간이나 바깥 세상을 궁금해하며 지하벙커에 갇혀 살아간다. 원래도 몸이 약했던 라스무스, 이 모든 일의 열쇠가 될 거라고 했던 소중한 남동생을 돌보기 위해 시모네는 헌신을 다한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두 사람은 어느새 부쩍 어른이 되어간다.

작품 속에 나오는 시모네는 모든 일을 척척 해내고 남동생 라스무스까지 돌보는 완벽하고 멋진 누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잘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뷸안해 한다. 게다가 돌아온다고 말한 후 사라진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 아빠가 돌아올 거라는 소망으로 하루하루를 그저 힘겹게 버텨내는 중이다.

원치 않게 벙커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생기고 두 사람은 마르틴 일행을 따라 바깥으로 나가보기로 결정한다. 그동안 세상은 황량한 죽음의 장소로 변해있었다.

이 치명적 바이러스의 공격은 사람 뿐만 아니라 환경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이동하는 시모네, 라스무스와 마르틴 일행 뒤로 아폴론이라는 집단이 이들을 뒤쫓는다.

그들이 시모네와 라스무스를 쫓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사람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숨막히는 시간들 속에 놓여진 시모네와 라스무스. 살아남기 위해서 이들은 과연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급작스런 위기가 닥칠 때, 그 위기에 걸맞는 대비를 하는 것이 가능할까? 준비되지 못한 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삶이란, 존재란, 사람이란, 관계란,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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