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

생각보다 삶

by Pearl K

바야흐로 꽃피는 봄이었다. 날씨는 봄이었으나 내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88만원 세대였다. 비정규 계약직으로 불안정하게 일하다 보니 돈은 언제나 턱없이 부족했다. 적은 월급에서 그마저도 세금을 제하고 나면 방세와 생활비만으로도 주머니 사정은 빠듯했다.

어쩌다 갑작스럽게 급한 지출이 생기면 부족한 비용을 메꾸어야 했다. 정말로 한푼이 아쉬웠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친구에게 조심스레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응. 난데.. 잘 지내지?

-어. 뭐 별일 없어. 너는? 잘 지내?

-그럭저럭 뭐 괜찮아. 근데 있잖아.

-무슨 일 있어?

-나 내야할 돈이 좀 급해서 그런데 혹시 5만원만 빌려줄 수 있어?


-아 그래? 알았어. 5만원이면 돼?

-응 진짜 고마워 미안해. 금방 갚을게.

-잠깐만. 계좌로 돈 보냈어 확인해 봐.

-에? 왜 10만원을 보냈어. 5만원만 있으면 돼.

-그거 내고 나면 너 쓸 돈 없을 거 아냐.

-그렇긴 한데...

-그리고 그거 안 갚아도 되니까 부담 갖지 마.

-헉... 진짜 고마워.

다급하고 힘든 상황에서 친구의 도움은 마른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덕분에 급한 불을 껐다. 친구네 집에 놀러가면 맛있는 음식도 배달시켜 주고 함께 노는 비용까지 내곤 했다. 내 상황을 잘 알아서 더욱 마음을 써주었다.


어느 날, 그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의아한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응. 무슨 일 있어?

-나.. 되게 기분 나쁘더라.

-뭐가?

-너 나한테는 맨날 돈 없다고 하면서, ××미니홈피 보니까 너 필요한 건 다 사는 거 같아서.

-아니. 그건 그런게 아니고...

-암튼 나는 니가 여러가지로 어려운 거 같아서 신경 썼는데 고맙단 말도 들은 적 없는 것 같네.

-당연히 고맙게 생각하지.

-니가 너무 모르는 것 같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건 아닌데...

-암튼 난 할 말 다 했으니까 끊는다. 잘 살아.

청천벽력 같았다. 처음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인식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동안 내가 그 친구가 나를 위해 비용을 쓰고, 챙겨주었던 것에 대해 그냥 생각없이 받기만 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차마 친구에게 다시 전화를 할 수조차 없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무심함과 어리석음을 계속 후회했다.

친구의 마음에 고마움을 적극적으로 표시할 걸, 아무리 없어도 한 번쯤은 내가 계산할 걸, 필요한 거 없는지 미리 물어보고 챙길 걸. 그렇게 후회하는 동안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해서 전화를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벌써 시간은 한참이나 지나고 있었다. 올해는 넘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진심으로 사과의 마음을 전했다.

-있지. 지난 번에 니가 말한 거 생각해 봤는데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몰랐더라. 그동안 니가 해준 게 진짜 많았는데 너무 당연한 것처럼 받기만 해서 미안해. 그리고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 앞으로는 내가 더 잘할게. 너무 미안해.

친구는 내가 하는 얘기를 한참 듣고 있더니,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알았으면 됐어. 나도 말해놓고 좀 심했나 싶었어. 이제 그렇게 안 할 거지? 또 그러면 진짜 가만 안 둔다?

-당연하지!! 달라진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화해했다. 그때 친구가 제대로 한 번 짚어주어서 참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친구들의 호의가 당연한 권리인 줄 착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제는 안다. 호의는 당연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배려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충분히 고마움을 표현하고 어떤 형태로든 그 배려를 갚아주어야 한다.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호의와 배려를 흘려보내고 전달해야 한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바로잡아 준 친구 덕분에 사람과 사람 간의 예의에 대해서 깨우칠 수 있었다. 최근에 읽었던 정지우 작가님의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모든 일에, 모든 시간에, 모든 관계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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