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 세계적으로 가장 핫한 콘텐츠를 뽑으라면 1위는 단연 오징어 게임이 차지할 것이다. 이미 전 세계의 1억 4200만 시청자가 보았다는 이 작품을 나도 드디어 보았다. 작품에 대한 리뷰와 분석을 비롯한 너무 많은 그리고 다양한 시선과 관점의 이야기들이 이미 넘쳐나서 내가 무엇을 보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았다. 막상 다 보고 나니 또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생겼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작품을 보면서 나는 등장인물들이 맺고 있던 여러 관계들을 먼저 집중해서 보게 되었다. 주인공인 456번 성기훈(이정재)은 10여 년 전 드래곤모터스에서 실직한 후,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다가 아내와 딸을 잃은 이혼남이다. 동시에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어머니에게 얹혀사는 캥거루족이고, 한 방의 역전을 꿈꾸며 경마장을 찾기도 한다. 기훈은 자신이 맺고 있던 가장 가까운 모든 관계에서 철저히 실패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를 믿어주려고 애쓰는 유일한 인물은 딸뿐이다.
다른 등장인물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작품 속에서 내내 기훈에게 부러움의 대상인 218번 상우(박해수)는 시골 동네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던 아이다. 같은 동네에서 자란 아이라면 누구나 성우와 비교하는 부모님의 잔소리를 들었을 법하다. 서울대를 나와 증권회사에도 취직한 상우는 모두의 부러움을 사던 대상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회사공금을 횡령한 것도 모자라 아들을 깊이 신뢰하던 어머니의 집과 가게까지 모두 저당 잡힌 상태였다. 회사에서도 잘리고, 어머니께도 불효를 저지른 그는 경제사범으로 경찰에까지 쫓긴다.
67번 강새벽(정호연)은 탈북자다. 부모님과 동생과 함께 탈북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는 중국에서 공안에게 잡혀 수용소에 끌려갔다. 다시 어머니를 데려오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브로커에게 줄 돈을 벌기 위해 그녀는 하나뿐인 남동생을 보육원에 맡겨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애써 모은 돈을 브로커에게 송금했지만, 사기를 당했고,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애써 도착한 한국은 그녀에게 친절한 사회가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버티기 위해 살기 위해 자신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스스로 더 단단해져야 했다.
101번 덕수(허성태)도 서로가 물고 물리는 조직의 세계에서 그 누구도 믿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뒤통수치며 살아남아온 인물이다. 그는 자신과 편을 이루었던 사람들조차 전혀 믿지 못한다. 박쥐처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자신의 살 길을 마련하고자 애쓰던 한미녀(김주령) 역시 싱글맘으로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고, 사기 전과 5범이라고 귓속말하는 것을 보면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어본 적은 없었을 거라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1번 오일남(오영수) 역시 치매와 암에 걸린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다. 그는 이 서바이벌 게임 안에서 가장 약하고 힘이 없는 노인으로 등장한다. 살기 위해 다른 이들을 죽여야 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가장 먼저 도태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등장인물들은 오징어 게임 속에서 만난 타인에게는 오히려 가족에게 평소 하던 것보다 몹시 친절하고 다정하다. 그러다가도 살아남기 위해 눈앞에서 죽어 넘어지는 타인들을 철저히 외면한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또 등장인물들은 모두 극도의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자구적인 노력은 오히려 그들의 모든 관계를 깨어지게 만들었다.
주어진 현실의 괴로움 속에서 이들은 남아 있는 관계를 지키기 위해 몹시 애쓴다. 즉, 기훈은 어머니의 수술비를 위해, 상우는 어머니의 가게와 집만큼은 지키기 위해, 새벽은 자신의 어머니를 탈북시키기 위해, 한미녀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 이 게임에 참가했다. 서사로만 볼 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 사람은 덕수(허성태)뿐이었다.
이 글의 제목은 240번 지영(이유미)의 대사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인 것을 눈앞에서 목격했던 지영. 그녀는 새벽이 처럼 세상에 믿을 존재 하나조차 없이 남겨졌다. 그래서인지 오징어 게임 안에서 지영은 잔뜩 날이 선 고슴도치 같은 새벽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던 두 사람은 처음에 줄다리기 게임을 하면서 서로를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에 두 번째로 같이 구슬치기 게임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게 된다.
사는 게 험난하고 고독해서 오히려 스스로를 세상에서 더 가두었던 두 명의 소녀는 그 시간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 보인다. 240번이 새벽이에게 건넨 마지막 한 마디 "나랑 같이 게임해줘서 고마웠어"는 그런 많은 감정들이 가득 담겨 있는 대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게임 직전, 기훈과 새벽이 가까워진 순간 공교롭게도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떠올랐다. 기훈이 박동훈(이선균)으로 새벽이가 이지안(이지은)으로 보였다면 너무 오버일까. 적어도 내게는 그 순간이 그랬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 친구(이영기)의 아내 등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고뭉치에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만 보였던 기훈은 새벽이가 자신의 동생을 믿고 부탁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준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인간관계에서 실패했던 그들은 그나마 자신이 가진 유일한 것, 그들의 목숨이 걸린 가장 잔혹한 게임 앞에서 남은 인간성을 테스트받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지독한 게임 안에서조차 오일남과 강새벽 등 다른 이들을 돌보던 기훈은 오히려 그래서 최종 우승자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잔인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내리 볼 수밖에 없던 오징어 게임의 흡인력은 이런 디테일과 섬세함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을까.
생각할 거리를 잔뜩 던져주는 작품이라 재밌게 볼 수 있었다. 시즌2에서는 위하준과 공유, 이병헌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들을 추가로 볼 수 있길. 또 기존 호스트의 죽음으로 새롭게 호스트가 된 인물은 누가 될 지도 몹시 궁금하다.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서 만났던 배우들이 잔뜩 등장해서 반가웠다. 기훈의 친구 역으로 등장한 이서황 배우, 게임 시작 전부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시작 전까지 투덜이 캐릭터 제대로 보여주던 홍우진 배우(최근 슬의 2에도 나옴). 유리로 만든 다리를 건너는 게임에서 덕수 바로 앞이던 임기홍 배우. 구슬치기 게임에서 덕수와 1대 1 대결을 벌인 구자형 배우. 구슬치기 게임에서 임팩트를 남긴 김동현 배우. 그 외에도 455번까지의 번호를 달았던 모든 참가자들, 또 세모 동그라미 네모의 가면을 쓴 감시자들을 연기한 배우분들까지. 좋은 작품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가족 간에, 친구로, 혹은 사회에서 만나 다양한 관계를 맺어간다. 그 관계들은 순수한 목적인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각자의 이익을 위해 이용만 하는 관계도 있다. 인간관계에 서투르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기훈처럼 나는 그렇게 내가 가진 인간관계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