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 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던 때가 있었다. 텅 빈 학교의 샤워실에서 그리고 화장실에서 아이들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당할 때가 그랬다. 또 계속되는 실패 속에도 여전히 삶에 대한, 혹은 사람에 대한 기대를 놓지 못하는 나 자신이 미련하게 느껴졌다.
지금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상상 속이거나 공상 속의 일이 아닐까 하는 멍한 무감각을 느끼기도 했었다. 끊임없이 조여 들어오는 삶의 무게와 수많은 거절감 앞에서 차라리 수증기가 되어 증발해버리길 바란 적도 있었다. 차라리 구름이라면 내가 느껴야 할 것은 빗물의 무게뿐일 테니까.
나는 이 책을 꽤 오래전에 읽었어야만 했다. 내 직업은 학교도서관의 사서이고, 아이들에게 책을 소개하려면 최소한 절반이라도 책을 읽어야 하니까. 공교롭게도 이 책이 출간되었을 무렵부터 나는 많이 아팠고, 몸도 마음도 무엇보다 눈도 백내장으로 망가져 있었다.
수술로 깨끗해진 시야를 되찾고 난 뒤에도 좀처럼 책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스마트폰과 TV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수술로 깨끗해진 시야가 근거리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문장은 언제나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막상 손에 드는 데는 굉장한 용기와 시간이 필요했다.
갑자기 몰려온 행사들로 역대급으로 정신없는 이 시기에 책을 손에 든 건 퀴즈 문제를 내기 위해서였다. 퀴즈 문제를 내려 책을 거들떠보다 보니, 담긴 이야기에 깊은 흥미가 생겼다. 책을 손에 들고 단숨에 읽어 내려갔고, 다 읽을 즈음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엉엉 울었다.
맨 뒤에 적힌 작가의 말에 보면 처음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아이를 낳은 지 4개월도 안 되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렇게 작고 소중한 아이가 나중에 어떤 모습이 되더라도 나는 그 아이를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 말이다.
작가는 그 질문으로부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 선윤재가, 깽판 치는 사고뭉치 곤이가 나왔다고 했다. 책을 읽는 사람이 처음에 느낄 거라 여겼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윤재와 그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일 거다. 그러나 내게 느껴진 건 안타까움이 아니라 부러움이었다.
‘뭐든 여러 번 반복하면 의미가 없어지는 거야. 처음엔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고 조금 더 지난 뒤엔 변하거나 퇴색되는 것처럼 보이지. 그러다 결국 의미가 사라져 버린단다.’
요즘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의미가 없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좋아하던 일도, 사람도 다 변하거나 퇴색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사라진 의미들을 찾으려 애도 써 보았지만, 점점 더 의미를 모르게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그걸 번 아웃이라고 불렀다.
때로는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듯이 의욕에 불탔다가도,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바닥까지 가라앉은 느낌이 든다. 풍부하고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가도 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싶어지기도 한다. 지금 이 자리에 멈춰있는 내게 미래라는 것 자체가 가끔은 허망한 환상 같기도 하다.
어제는 다른 사람들의 인스타그램을 훑어보다가 갑자기 오열했다. 나는 너무도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던 일이 이루어진 사람들을 보게 되어서였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끼게 되는 이 굴레는 마음을 자꾸만 무너지게 만든다. 확실히 ‘지금 나는 아주 많이 지쳐 있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다.
미련하지만 여전히 희망을 놓지 못하는 나는 그저 되는대로 부딪쳐 보기로 한다. 주어진 상황과 환경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것. 내가 느끼는 감정과 기분들에 솔직해지는 것. 누군가가 나와 다르다고 해도 그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새롭고, 알 수 없는 아주 다른 얘기를 써나가는 삶으로 살고 싶다.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가 될 지는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지만, 여러 맛을 지닌 채 그저 흘러가는 인생 속에서 기쁘고 행복해지게 만드는 작은 요소들을 잘 찾아낼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