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어그러지는 이유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인정할 수 있는 마음

by Pearl K
모든 관계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건강할 수 있는 법이다.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그 후회가 찾아온다. 나는 왜 이 관계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 말이다.


이런 시절부터 엄마의 통제적인 모습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참 힘들었다. 나의 짧은 식견으로도 분명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고, 거부하고 저항하고 싶었다. 당시는 부모의 보호 아래가 아니면 독자생존이 불가능한 어린 나이였고, 어쩔 수 없이 그런 저항감들을 마음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담아왔다.


여러 번 화도 내고 성질도 부려봤지만 부모 관계에서 자식은 철저한 약자였다. 나의 반항은 결국 부모님이 휘두르는 통제의 강화라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그때의 트라우마일까? 지금도 통제하려 드는 성향의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차갑게 식는다.


싫어하는 부분은 닮는다고 했던가. 아이러니하게도 나 역시 꽤나 통제적인 성향을 타고났다. 하루의 계획을 세우고, 정해둔 계획에 따라 순서대로 업무를 처리한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면 마음이 몹시 불편해진다.

그런 상황들을 피하기 위해 되도록이면 다른 이들에게 사전에 정확한 안내를 한다. 이용규칙과 홍보물을 만들어 여기저기 잘 보이는 곳에 게시해 둔다. 예상치 못할 변수의 범위를 최대한 줄여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틈을 파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디. 그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불편하고 화가 난다.


어느 날 문득 그들에게 화를 낼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성향에 대해 차분히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대화와 그를 통한 이해가 가능한 생물이니 말이다. 그 후부터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시간이 필요하니, 내게 어느 정도의 시간과 공간의 여유를 좀 달라고 말하는 편이다. 이런 대처가 가능해진 후로는 다행히 마음도 훨씬 편안해졌다.


그렇게 나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통제해야만 한다는 의식을 잠깐 내려놓는다. 이어,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해도 미묘하게 거슬리고 어긋나는 순간들은 언제나 발생한다.

나는 선택해야만 한다. 내 통제력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상대의 통제력에 휘둘려 나 자신을 놓치고 잃어갈 것인지. 꽤 오랜 날을 고민했는데, 이번엔 내 스스로의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닌 내 인생이니까.

누군가의 통제와 제한에 따라 나 자신을 가두기보다는 스스로 선택한 것들을 좀 더 믿어주기로 했다. 그러면서 나 역시 불필요하게 타인을 내 통제 속에 억압하고 가두려 했던 일들은 없었는지 반성해 보게 된다.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그림출처: 서밤님의 인스타툰 21.12.1 마지막 페이지


우리 집에는 세탁바구니로 쓰는 커다랗고 알록달록한 비닐가방이 있다. 원래는 시댁에서 이것저것 음식들을 싸 주실 때 종류가 많으니 한 번에 들고 가라고 담아주셨던 가방이었다. 어쩌다가 이 가방을 세탁바구니 용도로 쓰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며칠 전 비닐가방이 꽤 오염되었다고 판단되어 빨래한 후 건조대 뒤편에 걸어두었다. 그리고는 어디다 두었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오늘 빨래 두 가지를 나누어 빨아야 해서 세탁바구니용 비닐가방을 애타게 찾았지만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게 커다란 가방이 왜 보이지 않을까 하고, 언젠가 어디선가 나오겠지 하고 반쯤 포기했었다.


새벽까지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아 찬 바람을 쐬러 베란다에 나가 데크 마루의 바닥에 주저앉았다. 모두가 잠들어 온통 고요한 세상이 바깥에 펼쳐지는데, 나의 시선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애타게 찾던 세탁바구니용 비닐가방이었다. 그 비닐가방이 데크 마루에 앉은 내 코앞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


마치 탄성과 같은 깨달음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방마다 그렇게 찾아도 없던 비닐가방이, 시선을 낮추어 앉으니 단번에 보였다는 것이 마치 계시 같았다. 이건 통제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관점이 달라 생긴 오해일 수도 있겠다 싶어졌다.

물론 오해를 푸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힘이 과하게 들어갔던 부분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통제권을 누가 빼앗아 오느냐 보다 불필요한 힘을 들일 필요 없이 서로의 간극을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을 깜짝 선물로 받은 느낌이었다.


오늘은 더 고민하지 않고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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