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눈이 내렸다. 눈 오는 날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덜컥 걱정이 앞섰다. '무사히 집까지 갈 수 있으려나' 그 마음 때문에 내리는 눈의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에서는 그 장소에서 우리 집까지의 거리가 평소보다 10분 정도 더 걸린다고 했다. 심호흡을 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가는 내내 눈발은 점점 굵어졌고, 와이퍼를 계속 작동시켜도 자동차 유리 위로 쌓이는 눈은 점점 더 많아졌다.
와이퍼 끝으로 더 이상 얼음이 쌓일 공간이 남지 않았을 무렵 우리는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분명 아침에 출발할 때는 화창한 겨울 날씨였는데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온 후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사실은 아직 영화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보는 눈이었다. 지난번 새벽에 잠시 내렸던 눈은 일어나기 전에 이미 죄다 녹아버려서, 눈이 왔었다는 이야기 정도만 들을 수 있었다. 내 눈으로 직접 본 올 겨울 첫눈이다.
첫눈이 오면 초록색 나무도 야외주차장에 주차된 빨강 파랑 은색 검은색 차들도 모두 하얀색이 된다. 그렇게 눈으로 덮인 세상은 온통 깨끗해 보인다. 눈을 하늘의 선물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나 보다.
그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올 한 해를 보내며 지치고 힘들고 어려워서 얼룩덜룩해진 마음들. 그 마음들이 눈으로 모두 새하얗게 뒤덮여 앞으로 맞이하는 새해는 깨끗한 마음으로 출발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이다.
블로그를 뒤적이다 4년 전인 2017년 첫눈이 왔을 때 썼던 글을 발견했다.
"밤새 눈이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만난 세상은 눈부시게 새하얗다. 길 위로 얇은 살얼음이 얼어붙어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넘어질까 무서워 나도 모르게 잠깐씩 숨을 참게 된다.
겨우 빙판 구간을 통과하여 큰 숨을 내쉬니,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입술 사이로 줄줄이 떠밀려 나온다. 정류장에 선 사람들은 요즘 유행이라는 까만 롱 패딩을 열에 서넛은 입고 서 있다. 까만 롱 패딩을 다 같이 입고 추위에 발을 구르며 오종종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자니, 흡사 펭귄 떼 같기도 하다. 그 모습을 보니 미소가 슬며시 내 입가를 맴돈다.
정류장에 버스가 멈춰 서면 좁은 출입문으로 쏟아지듯 사람들이 내리고, 또 그만큼의 사람들이 다시 버스를 탄다. 버스 창밖을 바라보려 했더니, 유리창은 사람들의 하얀 입김이 모이고 모여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옇다.
분주한 출근시간 대중교통이 움직이는 동안 잠시나마 짧은 휴식을 맛보았다. 목적지 근처에 내린 사람들은 바삐 걸음을 재촉하며 각자의 방향으로 정신없이 움직인다. 나도 넘어질세라 발밑을 쳐다보며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 같은 날 아침엔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가장 그립게 고프다. 오랜만에 모닝커피를 한 잔 해야겠다."
4년이나 지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겨울의 풍경은 막연한 그리움과 약간의 허전함,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원 섭섭한 마음, 새 날들을 향한 기대감 같은 것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것 같다.
추운 겨울을 지나면 다시 봄이 올 테니까. 무작정 움츠러들기보다 좀 더 화창할 봄을 위해 든든히 준비하는 삶으로 겨울을 살아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