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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Mar 11. 2022

당신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뒤늦게 알게 된 것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위해서 갖춰야 할 태도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성실함과 꾸준함일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일은 특히나 결코 쉽지 않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이야기다. 같은 학교 친구인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학교 축제에서 올려진 연극 공연에서 멋지게 연기를 했다. 좋은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밤늦게까지 운동장에서 소리 지르며 연습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매 맞는 장면의 감정연기를 표현하기 위해 상대 배역을 맡은 아이들에게 연극 소품인 대걸레 자루로 실제로 때려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결국 대걸레 자루가 부서졌다고도 했다. 소문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 자체로 사춘기 소녀들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하기엔 충분했다.


   연극 공연을 보고 그 소년에게 반해버린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소년을 따라 연극부에 들어갔다. 4월 초 소년은 부모님을 따라 전학을 갔고, 어느 누구보다 더 아끼게 되어버린 연극을 하고 싶어 나는 여름방학 내내 땀 흘리며 공연을 준비했다. 낯선 무대 위에서 걷는 방법도, 몇 마디 안 되는 대사도, 어색한 팔과 다리를 겨우 움직여가며 배우는 춤도 익숙해져 갈 무렵 기다리던 축제가 열렸다.


   정해진 학년별 관람 시간에 최선을 다해 공연을 올렸다. 원래 그런 건가? 뭔가 부족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무사히 2회 차의 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정리하려는 찰나에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공부하느라 공연을 볼 수 없었던 고3을 위해 야간 자율학습 전 저녁시간에 특별공연을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낮에는 본래 대본에 비속어로 쓰인 대사의 일부를 정제된 언어로 바꾸어 공연했었다. 비슷한 별명을 가진 선생님이 축제 총괄 담당자 셨기 때문에 리허설을 보시고 항의를 하셨던 거다. 저녁시간에 오직 고3 만을 위해서 하는 공연은 달랐다. 우리는 원래의 비속어가 섞인 대본대로 공연을 하기로 했다. 다행히 감독 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선생님들은 다음 축제 순서를 위해 초등학교 강당으로 가신 후였다.


   일말의 아쉬움이 있었는지 모두들 속 시원하게 대사로 쏟아내며 공연을 했다. 앞에 했던 2회의 공연보다 훨씬 에너지가 살아있는 공연이 되었고, 관객 반응도 아주 뜨거웠다. 무대를 마치고 커튼콜 인사를 하는데 박수와 환호 소리에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연극과 연기, 무대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공연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고3이 되어 처음 진로를 고민할 때 '연기하는 게 좋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도 좋아하는데 난 무엇을 하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의외로 고민은 길지 않았다. '뮤지컬 배우가 되어야겠어. 연기와 노래, 춤을 모두 할 수 있는 종합예술이니까! 이것보다 더 내가 원하는 것에 부합하는 일이 있을까?' 진부한 표현이지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고 진로상담을 위해 연극부 담당 선생님을 찾아갔다. 연극부 담당 선생님은 사립 고등학교에 흔치 않은 30대 초반의 젊은 남자 문학 선생님이었다. 게다가 경희대 국문과 88학번으로 유서 깊은 연극동아리 출신이셨다. 또한 당대 최고의 아이돌이던 H.O.T. 의 강타를 살짝 닮은 외모를 가지고 계셔서 인기 최절정이라 기다리는 줄이 아이돌 저리 가라였다.


  그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연극부 담당 선생님을 만나 진지하게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선생님은 '그래. 뭘 하려고 하는데?' 하시며 관심 있게 물어봐 주셨다. 용기를 얻은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봤는데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고. 뮤지컬과 가고 싶은데 가능성이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 선생님의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내게 건넨 말은 충격적이었다.


  "유진아, 네가 열심히 하고 성실하긴 한데.. 넌 끼가 없어서 안 돼!"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 나는 끼가 없구나. 그래서 안 되는구나.'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감사하다고 하고 자리를 벗어나서 혼자 남게 된 후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드디어 꿈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들었던 거다. 그때 만약 연극반 선생님의 끼가 없다는 말에 좌절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도전을 멈추지 않았더라면,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실제로 주변에 배우 생활을 오래도록 하고 있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끼가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배우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들어보면, 연기에는 끼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오히려 성실함과 꾸준함이라고 했다. 당시엔 그걸 미처 알지 못했었다. 다른 진로를 떠밀리듯 택하고 나서 학과에서도 마음을 못 잡고 편입을 주문처럼 외우며 방황했다.


   대학교 1학년 1학기 종강을 마치고 연극부 담당 샘을 만나 뵈러 졸업한 고등학교를 다시 찾아갔다. 선생님이 밥을 사주신다고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샘, 그때 제가 뮤지컬과 간다고 했을 때 저한테 했던 말 기억하세요?"

  "글쎄.. 뭐라고 했는데?"


  "너는 끼가 없어서 뮤지컬과는 안 된다고요."

  "내가? 언제?"


   물어본 것이 허무하게 선생님은 그때의 일을 기억조차 못하셨다. 대체 왜 그렇게 힘들게 포기했나 싶게 황당한 반응이 돌아와서 몹시 당황했다. 솔직한 맘은 '왜 사람 꿈을 짓밟아놓고 기억도 못하시냐'라고 하고 싶었다. 싹부터 잘라버린 내 인생 돌려놓으시라고 따지고 싶었다.


   그 후로 어른에게 조언은 구하지만 배우고 싶은 것이 생기면 꼭 배운다. 성실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반드시 한다. 성실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먹고 싶은 것이 생겨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생겨도, 무엇이든 새로운 도전을 할 때 일단 용기를 내어 도전한다. 성실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새로운 도전을 잘 해내면 최상이겠지만, 실패한다고 해도 괜찮다.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내가 가진 최강의 무기는 성실함과 꾸준함이니까.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을 때 후회가 남지 않도록 나의 장점인 성실함과 꾸준함을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앞으로도 성실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지금까지처럼 계속 도전하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태도를 포기하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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