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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Mar 23. 2022

말이 칼이 되어 마음을 베이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어

내가 실수로 태어난 아이가 아닐까 걱정하고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엄마랑 기질이 워낙 달라서 혹은 너무 똑같아서 모녀는 서로를 참 용납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엄마의 날 선 말들은 내게 큰 생채기를 남겼고, 나는 그 말들을 웃으며 넘길 수 없었다.


   학교에서 혈액형 검사를 했다. 우리 가족은 생물 교과서였다. 아빠는 B형, 엄마는 A형, 오빠도 A형, 여동생은 AB형, 나 혼자만 O형. 사실 BO와 AO가 만나 OO가 될 수 있는 조합인데 그땐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친구들이 말했다. ‘어? 다 A나 B가 들어가는데 너만 O형이네. 왜 너만 달라?’ 그 말이 아팠다.


   집에 와서 왜 나만 혈액형이 다르냐고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엄마가 대뜸 ‘너 다리 밑에서 주워왔잖아.’ 한다. 그러고는 웃는다. 농담이겠지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 ‘진짜? 진짜로 나 주워왔어? 장난치지 말고.’,


  ‘진짜야. 그 외할머니 집 거기 시냇가 다리 밑에서 너 주워 온 거야.’ 쿵 하고 자그맣던 균열이 깊고 넓어진다.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엉엉 우는 나에게 엄마는 ‘가시나야. 농담한 건데 뭘 울기까지 하냐’고 깔깔 웃었지만 웃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일그러져 보인다. 정말 친부모가 따로 있는 거 아닐까 몇 날을 고민했었다.


   엄마는 많은 사랑을 가진 분이었지만 말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다, 엄마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 다가갔다가도, 날 선 말들에 여기저기 마음을 베여 도망쳤다.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작은 말들에 쉽게 상처받는 내 여린 마음도 미웠다. 나는 상처받기 싫어 단단하게 껍질을 만들고 그 속에 여린 내 마음을 숨겼다.


   더욱 높고 단단하게 아무도 부수지 못할 껍질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책 속으로 도망쳤다. 긴 머리 라푼젤이 되어 스스로 탑에 갇혔고, 빨강머리 앤이 되어 영혼의 단짝 다이애나를 만나고, 인어공주 아리엘이 되어 왕자님과 사랑에 빠졌다. 아빠 대신 야수의 성에 갇혀 찻주전자 아주머니와 촛대 아저씨를 만났다. 책 속 세상에서는 누구도 내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 나는 자유로웠다.


   한 번 가둬둔 마음은 밖으로 잘 꺼내지지 않았다. 바깥으로 여린 마음을 꺼냈다가 또 상처 입고 버려질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나 역시 온몸의 털을 잔뜩 세운 고슴도치 같은 아이가 되었다. 겉으로는 냉정하게 말하고 방에 돌아와 한참을 우는 날이 반복되었다. 괜찮은 척을 했지만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었다.


   그렇게 혼란과 불안정 애착으로 가득한 모습으로 언제나 안정감을 갈구했다. 오래 기다렸는데 늦었지만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거면 충분했다. 불안하고 둘 곳 없던 마음을 넉넉하게 받아주는 좋은 사람이다. 그렇게 나만의 새 가정을 꾸리면서 처음으로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가족이라는 혹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구도 쉽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큰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이 누군가에게는 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하자. 그 칼이 한 사람의 삶을 그가 디디고 있는 땅을 온통 벌어진 틈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걸 깨닫자. 서로의 여린 마음을 지켜주는 서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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