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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닮고 싶은 사람

내 좋은 면이 잠식되지 않게

by Pearl K

가난하지만 주눅 들지 않고 하고 싶은 일에는 언제나 진심인 사람. 자신의 가치를 바로 알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 화도 잘 내지만 그만큼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도 커다란 사람.


성별을 떠나서 자신답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내게 처음으로 가르쳐 준 그녀는 내게 인생의 첫 번째 롤모델이 되어 준 사람이었다. 그녀처럼 살고 싶었고, 꿈꾸는 것을 이루어내고 싶었다. 다른 누가 아닌 나다운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선물 받은 어린이 세계문학전집에서 《작은 아씨들》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작품 속의 배경은 미국의 주 분리 및 노예제 폐지 등의 문제로 1961년부터 4년간 치열한 내전이 일어났던 미국 남북전쟁 때다.


작품 속에는 전쟁터에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힘겨운 삶을 살아내는 가족이 등장한다. 자신들의 형편도 어렵지만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이 몸에 밴 엄마. 그 밑에서 자랐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네 명의 딸 메그, 조세핀, 베스, 에이미를 통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성장해 가는 따뜻한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등장인물 중에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사로잡은 사람은 둘째인 조세핀 일명 조였다. 여성의 지위나 역할이 몹시 한정적이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조는 그 어떤 등장인물보다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자신다운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조를 통해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게 되고, 내가 쓴 글을 출판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것도 작가를 꿈꾸던 그녀 덕분이었다.


며칠 전 2019년에 개봉한 영화 ‘작은 아씨들’을 보았다. 배우가 꿈인 큰언니 메그 역은 해리 포터의 헤르미온느로 우리에게 친숙한 엠마 왓슨이 맡았다. 작가가 꿈인 둘째 딸 조 역은 어톤먼트와 러블리 본즈 등의 연기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시얼샤 로넌이 연기했다. 피아노를 사랑하고 가장 착한 셋째 베스 역할은 엘리자 스캔런, 화가가 꿈인 넷째 에밀리 역할은 블랙위도우의 동생 역할을 한 플로렌스 퓨가 맡았다.


원작을 너무 좋아해서 영화를 꼭 보고 싶었는데, 너무 늦게 본 것이 아쉬울 정도로 영화 속에서 책 속의 친숙한 장면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 특히 한 장면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근처에 사는 귀족 집안의 손자인 로리 덕분에 메그와 조는 연극 구경을 가게 된다. 에이미도 둘과 함께 가고 싶어 하지만 조는 두 사람만 초대를 받았다며 거절한다. 메그와 조가 즐겁게 연극을 즐기는 사이, 화가 난 에이미는 조에게 가장 소중한 걸 파괴하는 것으로 복수를 하기로 한다.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작품이 에이미에 의해 불태워진 것을 알게 된 조는 에이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고, 에이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계속 동생을 외면한다. 어느 날 아침, 로리와 함께 스케이트를 타러 가는 조. 원래는 에이미도 데려가기로 했지만, 화가 난 조는 에이미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선다. 조에게 사과하려고 급하게 두 사람을 따라가던 에이미는 빙판이 깨지면서 차가운 호수에 빠진다.


큰 소리를 듣고 황급히 달려간 조는 로리와 함께 에이미를 구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조는 자신 때문에 에이미가 죽을 수도 있었다는 큰 두려움을 느낀다.


조 : 죽었으면 제 책임이었어요.

엄마 : 괜찮을 거야. 의사가 감기도 안 걸릴 거래.

조 : 저는 왜 이러죠? 수없이 다짐하고 반성의 글도 써 보고 울기도 해봤는데 도움이 안 되나 봐요. 감정이 격해지면 모질게 상처 주고 그걸 즐겨요.

엄마 : 넌 날 닮았어.

조 : 엄마는 화 안 내잖아요.

엄마 : 나도 거의 매일 화가 나는걸

조 : 정말요?

엄마 : 인내심이 많은 천성은 아니야. 나도 40년째 노력하며 배우고 있어. 분노에 내 좋은 면이 잠식되지 않게.

조 : 그럼 저도 그렇게 할래요.

엄마 : 나보다 좋은 방법을 찾았으면 해. 어떤 천성들은 억누르기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단다.



엄마와 조가 나누는 대화가 내 마음에 울림을 주었다. 불같이 화를 내고 한동안 에이미를 외면했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할 줄 아는 조의 모습이 기특했다. 또한 딸의 그런 모습을 감싸주고 이해하며 부모의 약함을 딸 앞에서 고백하는 엄마의 모습도 멋졌다.

때로 삶 속에서 나도 불같은 분노나 감당이 안 되는 커다란 절망을 느끼는 날들이 있다. 그러다 보니 격렬한 감정들에 잠식되어 방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타인의 감정에 민감한 데다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모든 감정을 조금씩은 과도하게 받아들이는 타고난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나의 모습이 약점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강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엄마의 마지막 대사를 통해 다시 깨닫고 배우게 되었다. 영화를 통해서 눈앞에서 어린 시절 책에서 만났던 조를 생생하게 볼 수 있어 몹시 즐거웠다. 덕분에 내가 어떤 꿈을 꾸고, 누구를 인생의 롤모델로 삼았었는지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다시, 조의 마음을 가져본다. 힘들고 어려운 이 시간도 조금은 더 잘 이겨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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