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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Aug 01. 2022

여백이 필요한 이유

비워야 채울 수 있다

평소 짧게는 2주에서 한 달, 길게는 6개월의 대략적인 플랜을 짜 놓는 편이다. 핵심사항들을 체크하고 정해진 기한 내에 언제까지 어떤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지의 디테일도 거의 정해둔다. 그날그날 발생하는 사안들에 따라 변칙의 여유를 두긴 하지만, 대부분 계획했던 범위 안에서 진행되길 원하는 편이다.


   사실 나는 계획한 것들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끼어드는 상황을 꽤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당황하게 되고 과부하가 걸리게 된다. 그럴 땐 일단 머리에 가득 찬 생각들을 걸러내고 비우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그래야 변화할 상황에 대처할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고, 새로운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다.


   가만히 서서 심호흡을 하면서 이미 과부하가 걸린 뇌로 밀려들어오는 모든 생각들을 차단한다. 생각을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조차도 또 다른 짐이 된다. 그저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하고 몰두해보기로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단순 반복 작업만 한 것이 없다.

   

   새로 들어온 책에 한 땀 한 땀 제 위치에 맞추어 도서 라벨과 키퍼를 붙인다. 또 이제는 필요 없어진 서류들을 잔뜩 쌓아두고 한 장씩 문서세단기에 넣는다. 규칙적으로 드르륵드르륵 종이가 갈려나가는 소리는 일종의 백색소음과도 같아서 복잡한 생각을 차단하는데 효과적이다.


   집에 있을 때는 그저 생각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영상들을 보기도 하고, 각종 요리의 재료들을 일정한 리듬으로 탁탁 탁탁 썰어낸다. 여러 재료 중에서도 특히 양파 써는 소리를 참 좋아한다. 그 소리는 왠지 마음에 안정감을 준다. 내가 하는 요리에 양파가 자주 사용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단순해지는 작업들을 계속 해내다 보면 어느새 시끄럽던 머릿속도 조금씩 잠잠해진다. 필요한 생각들은 정리와 저장이 되어가고, 불필요한 생각들은 가지치기가 된다. 비로소 머리에 깨끗이 비워낸 여백이 생긴다. 여백이 생긴만큼 새로운 것들로 채울 수 있는 여유를 얻는다.


   규장에서 출판된 이용규 작가의 '내려놓음'이라는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이 나를 통해 일하실 수 있도록 내 것을 내려놓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비움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비단 신앙뿐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적용할 수 있는 구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잡고 있는 수많은 것들로 인해 때로 길을 잃을 때가 있다. 아무것도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들을 해 내려고 했던 욕심이 오히려 가야 할 길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청년부 때 섬기던 교회에서 진행했던 70일 새벽기도가 그랬다. 새벽기도에 삶의 모든 초점을 맞추니, 분주하던 삶이 단순해지고 더 명확해졌다. 70일 중에서 56일을 참석했지만, 그 기간 동안 정리하고 비워낸 순간을 전보다 더 좋은 것들로 충분히 채울 수 있다는 걸 경험할 수 있었다. 지금 복잡한 나의 계획과 생각을 내려놓고 비워보자. 삶의 여백과 여유를 만들자. 그로 인해 비로소 만날 수 있 채움의 시간을 다시 넉넉히 경험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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