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어릴 적에 누렸던 시골 마을의 추억이 있다. 자주 방문하진 못했지만 방학이 되면 엄마는 삼 남매를 데리고 오랜 시간 동안 버스를 탔다. 대구 터미널에서 내려 다시 김천 시골까지 한 시간이 걸려 가는 버스를 갈아탔다. 버스는 마을 한가운데 어른들이 한껏 팔을 뻗어도 다 안을 수 없는 정도의 커다랗고 오래된 나무 앞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나무 아래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작은 평상이 있었다.
버스 문이 열리고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시골길을 따라 걸었다. 정미소와 골목 두어 개를 지나 세 번째 골목의 맨 안쪽 집이 우리 외갓집이었다. 끼익 하고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리면 외할머니는 버선발로 손주들을 맞으러 뛰어나오셨다. 헛기침을 하시면서 투박하게 “어, 왔나.” 하셨던 외할아버지. 살갑게 표현하시는 스타일은 아니셨지만 따뜻하고 다정했던 눈빛이 떠오른다.
그렇게 외갓집에 가면 항상 이유도 없이 신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만 걸어가면 작은 다리와 그 아래 졸졸졸 흐르는 시냇가가 있었다. 이웃집의 동네 아이들과 신나게 물고기도 잡고 수영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덕분에 물을 좋아하던 나는 지칠 때까지 실컷 물놀이를 할 수 있었다. 또 이웃집도 그 옆집도 모두 포도를 재배하는 분들이 많으셔서 여기저기 포도밭이 지천이었다.
시냇가에는 큰 돌들로 만든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돌다리 위를 걸어가며 가위바위보도 하고, 장난을 치다가 서로 밀려 휘청거리며 물에 빠지기도 했다. 시냇가의 물은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았고, 아이들이 놀기에 딱 좋게 무릎까지 올 정도로 얕았다. 가끔 깊어지는 곳도 있었지만 그래도 오빠들의 허리 정도 높이라서 위험하지 않았기에 더 좋았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피부가 까매질 때까지 물에서 놀고 나면 쉬이 배가 고파졌다. 외갓집으로 힘껏 뛰어가 배고프다고 응석을 부리면 외할머니가 갓 쪄낸 옥수수를 반씩 잘라 손에 쥐어주시기도 했다. 한 번은 포도를 따겠다고 전지가위를 들고나가는데, 마음이 급해 발을 헛디뎌 넘어졌고 전지가위 날이 쇄골과 쇄골 사이 아래에 찍혔다.
낯선 아픔에 으앙 하고 소리를 내어 울자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아빠와 엄마까지 어른들이 우르르 달려와 나의 안부를 살폈다. 피가 조금 나긴 했지만 천만다행으로 깊이 찔린 것은 아니어서 피는 금방 멎었다. 또 외갓집 마당에는 메리와 캐리라는 이름의 커다란 진돗개 두 마리가 살았다. 기다란 줄에 묶여 있었는데 언제나 우리에게는 살갑고 착하고 다정한 개들이었다.
하루는 건넛집 도사견(도베르만)이 외갓집에 와서 메리와 캐리에게 시비를 걸었다. 외할아버지가 줄을 풀어주자 캐리는 도사견을 맹렬히 추격했고, 죽을힘 다해 도망치던 도사견은 결국 도랑에 빠져 더러운 진흙탕으로 몰골이 엉망이 되었다. 나중에 그 소식을 듣고 우리는 캐리의 밥그릇에 더 푸짐한 양의 음식을 나눠주기도 했다.
외갓집을 많이 방문하지 못해서 더 많은 추억이 없는 것이 항상 아쉽고 속상하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자주 놀러 가서 함께 삶을 나누었다면 좋았을 텐데. 외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10년을 더 살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지라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든다.
청계천에서, 제주에서, 국내 곳곳에서 시냇가에 혹은 강 위로 놓인 돌다리 위로 건너갈 때면, 그때의 찬란하고 뜨거웠던 여름의 정취가 생각이 난다. 무엇보다 든든하고 따뜻했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고 참 많이 그립다. 인간이란 어쩌면 이런 따뜻한 추억들에 기대어 평생을 살아갈 용기와 힘을 얻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위한 소중한 추억을 이번 겨울에도 그렇게 하나쯤은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