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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의 낭만에 대해서

by Pearl K

여행을 갈 때 다양한 교통수단 중 무엇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나의 1위는 단연코 기차다. 기차에는 추억과 설렘, 낭만이 있다. 처음 기차를 타기 시작했던 것은 명절에 친척집에 가기 위해서였다. 집에 승용차가 생기기 전까지는 언제나 명절의 풍경은 기차의 경적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가까운 기차역은 집에서 한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었다. 엄마와 아빠를 따라 올망졸망한 나이의 삼 남매는 함께 기차를 탔다, 순천역에서 조치원역까지는 무궁화호로 꼬박 5시간이 넘게 걸렸다. 다섯 식구 모두의 명절 기차표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예매 시기를 놓쳐 좌석 없이 모두 입석으로 5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가는 일이 잦았다.


기차 안은 그야말로 장날을 방불케 했다. 명절에는 꼭 모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 가족처럼 입석을 끊은 가족들이 많았다. 꼬맹이들은 기차의 좌석 사이 틈새에 쪼그려 앉기도 했다. 때로는 통로에 둔 짐 위에 앉아있다가 사람이나 카트가 지나갈 때마다 일어나기를 반복해야 했다. 복작복작 정신없고 시끄러워 다시는 입석으로 기차 타기 싫다고 징징대기도 참 많이 했다.


대학 생활을 할 때도 몇 달에 한 번 집에 갈 때는 언제나 기차를 탔다. 자정이 넘은 12시 30분에 서대전역에서 출발해서 새벽 4시 50분쯤 광양을 거쳐 진주까지 가는 기차였다. 야간에 운행되는 열차다 보니 객실의 불을 모두 꺼 주셨고, 덕분에 기차에서 숙면을 할 수 있었다. 새벽 5시가 채 못 된 시간에 기차역에 내려 개찰구로 나가면 아빠가 마중 나와 있었다. 기차역에서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빠의 얼굴이 참 다정하고 고마웠다.


한 번은 길거리에서 구조한 유기견을 데리고 집으로 내려가는 밤기차를 탄 적이 있었다. 삽살개 믹스견이었는데 워낙 조그마해서 가방에 쏙 들어가게 숨길 수 있었다. 혹시 낯선 느낌에 짖지 않을까 하는게 최대의 걱정이었는데, 가방 안이 편안했는지 강아지는 쿨쿨 잘도 잤다.


기차에서 내려 아빠의 차를 탔는데, 아뿔싸 왠일로 엄마도 함께 타고 계셨다. 찔리는 맘에 "나 좀 미친 짓을 했어." 하고 고백했더니 엄마가 대뜸 "왜? 강아지 데려왔나?" 하셨다. 도대체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그 강아지는 엄마아빠가 임시보호로 잘 데리고 있다가 원하는 집에 입양을 보내주셨다.


서울에 와서 섬기는 교회 청년부와 함께 MT나 수련회를 갈 때도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곤 했다.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면 정동진까지는 금방이었다. 그 기찻길을 따라 동해바다를 많이 만나고 올 수 있었다. 또 가평까지 가는 열차를 타고 여느 청춘영화에서처럼 기차 안에서부터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도 있다.


내가 타 본 기차 중 가장 새로웠던 건 동유럽 여행을 갔을 때 체코 프라하에서 오스트리아까지, 또 오스트리아에서 독일 뮌헨까지 타고 갔던 기차다. OGG라는 이름의 이 열차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기차의 좌석 외에도 영화에서 나오듯 칸칸이 4인 좌석으로 탈 수 있는 곳도 있었고, 침대칸이 딸려있는 기차도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너른 들판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등 낯설면서도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기차에 담긴 추억을 꺼내 보니 이렇듯 한가득이다. 세세하게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코로나로 조금 주춤하긴 했어도 지금은 비행기를 타면 해외를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차여행의 낭만은 언제나 내게 아련한 추억처럼 남아있을 것 같다.


최근에는 기차여행에 대한 새로운 로망이 하나 생겼다. TV에서 보니 아산을 거쳐 군산으로 가는 서해금빛열차에는 온돌방으로 된 좌석이 있단다. 언젠가 새로운 가족이 생기면 남편과 함께 아이를 데리고 저 따뜻한 온돌방으로 된 기차를 타고 기차여행을 해 보리라 다짐한다. 아이에게도 나처럼 기차여행의 추억을 평생의 따뜻한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게 해 주고 싶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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