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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Feb 15. 2023

반신욕 예찬

20대 초반,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평소 아토피가 심해서 차라리 화장을 안 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쌩얼은 예의가 없다는 주변의 말들 때문에 기초화장 위에 메이크업 베이스를 바르고 팩트를 톡톡 두들겨 발라도 얼굴은 오히려 가면을 쓴 것처럼 늘 허옇게 떠 보였다.


   그렇게 건조해진 피부로 고생하는 것을 본 교회 언니가 국화꽃차를 이용한 반신욕이 도움이 될 거라고 추천해 주었다. 그땐 혼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욕실이 매우 협소해서 욕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간절하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게 마련이다. 검색 끝에 방 안에서도 사용가능한 마개가 달린 고무욕조를 구입하고 혹시나 물이 새지는 않는지 테스트까지 모두 마쳤다. 바닥에 수건을 여러 장 깔아 두고 고무욕조를 그 위에 올렸다. 대략의 부피를 예상하여 따뜻한 물을 욕조에 적당량 받아두고 수건을 이용하여 욕조를 TV가 잘 보이는 곳으로 조금 옮겼다.


   미리 전기포트에 물을 넣고 국화꽃을 넣은 후 팔팔 끓여서 우려낸 국화꽃차를 욕조 안에 부었다. 반바지와 면티를 입은 채로 욕조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국화꽃들이 출렁이며 몸 주위로 띠를 이루고 입에서는 저절로 "하아~"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물에 담긴 몸은 따끈따끈한데 자취방의 창문에서 들어온 외풍이 주는 서늘함에 코끝이 시리다. 이 오묘한 온도가 반신욕에 딱 적합한 느낌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노곤노곤해진 상태가 되어 나도 모르게 눈이 스르륵 감기기 시작한다.

   

   반신욕으로는 30분 정도가 딱 적당하다. 특히 태음인 체질로 상체에 열이 많고 하체가 냉한 경우에는 반신욕이 열의 방향을 바꾸어주는 좋은 처방이 되어준다고 한다. 완전히 잠들기 전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커다란 수건을 이용해서 젖은 몸을 감싸고 밖으로 나온다.


   그렇게 시작된 국화꽃차 반신욕은 6개월이 넘게 꾸준히 이어졌고 나는 그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었다. 국화꽃차 요법은 건조함 대신 촉촉한 보습효과를 더해주어 놀랄 정도로 피부가 부드러워졌다. 또 반신욕은 역위였던 열의 방향을 돌려주어 상체에 집중되어 있던 열이 온몸에 골고루 균형 있게 배분되도록 해주었다.


   그때로부터 20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여러 번 다시 반신욕을 시도하고 싶었지만 시도할 기회가 없었다. 한 달 전부터 반드시 다시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반신욕 욕조커버를 주문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옛날식 아파트라 좁긴 하지만 고맙게도 욕조가 있다.


   드디어 욕조커버가 도착했고 마치 미리 맞춘 것처럼 크기가 잘 맞았다. 커버가 도착한 다음 날 20년 만의 반신욕을 다시 개시했다. 그 후로는 욕조에 미리 물을 받아두고 여유롭게 들어가 있을 시간의 여유가 생각보다 잘 나지 않아서 아직 딱 두 번 밖에 못 했다.


   조금 전에는 반신욕에 사용할 수 있는 화학재료를 전혀 쓰지 않는 편백나무와 히비스커스 천연 입욕제를 주문했다. 다시 한번 상체로 몰려 역위되어 있는 열감을 재배분하고자 한다. 반신욕을 하면서 겨울 추위에 굳어버린 근육들을 부드럽게 풀어주고 지친 몸도 쉬어주면 다가오는 봄을 훨씬 더 산뜻하게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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