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 기쁜 것과 싫은 것을 모두 경험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게 묵묵히 똑같아 보이는 날들을 보내다 보면 가슴속에서 쌓여가던 막연한 답답함이 한계치에 다다르는 순간이 온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도 나를 아는 이가 없고, 제재할 이도 없는 광활한 어딘가에 가서 마음껏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하지만 그때마다 매번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당장 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렇게 내가 선택한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바로 '걷기'였다. 가장 먼저 평소에 가고 싶었던 길이나 아름다운 자연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나 한강이 보이는 곳 등 걷기에 좋은 곳을 몇 군데 선정한 후에 어디서부터 어떤 루트로 걸어가면 좋을지 찾고 코스를 짰다.
두 번째로는 대중교통으로 해당 장소까지 이동한 뒤에 거기서부터 도보로 출발하여 만 보 이상을 걷는 것을 목표로 하여 최종 목적지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정했다. 1차 목표를 완주한 후에도 계속 이동할 수 있는 체력과 의지가 있다면 2차 골인지점까지 가기로 했다.
서울에서도 고덕-암사 구간이나 합정, 당산-여의도 구간, 을지로-광화문-사직터널-독립문-연세대로 이어지는 구간 등 걷기 좋은 장소는 너무도 많았다. 한강을 끼고 걸으며 건조해져 버린 머릿속이 수분을 가득 채워 뽀송뽀송해지는 것이 좋았다.
시간이 허락해 준다면 때로는 제주로 떠났다. 일명 제주를 걸으며 비워내는 여행이다. 비워내야 할 것들은 때로는 응어리진 감정들이기도 했고 어떤 때는 켜켜이 몸에 쌓은 지방이기도 했다. 방학이나 여러 날에 이어진 휴일을 활용하여 제주 올레길을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짧게는 1박 2일 길게는 4박 5일의 일정을 잡아 매일 아침 8시면 일어나 간단히 조식을 먹고 해안가와 나지막한 오름이 포함된 올레길을 순서대로 하루에 한 코스씩 쭉 걸었다. 준비물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이어폰과 목마름을 해소할 물 한 병이면 충분했다.
때로는 흘러나오는 음악 속에 몸을 맡기고, 가끔은 제주의 바람소리, 파도소리, 방파제의 울음 같은 것에 귀를 기울이며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의 제주를 두 발로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세상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저 두 발과 두 귀가 내가 가진 전부인 것처럼 빙글빙글 춤을 추며 걷고, 예쁜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눈에 가득 채웠다. 한참을 걷다가 오후 2~3시쯤 배가 고파지면 마음에 드는 가게에 들어가 제주가 가득 담긴 식탁에서 허기짐을 채우고 해가 질 때까지 또 걸었다.
그렇게 5일을 걷고 나면 몸을 짓누르던 무거운 마음도 덕분에 붙었던 군살들도 어느 정도 가벼워졌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살이 빠져서 돌아오는 나를 보고 주변 지인들은 자주 여행을 떠나라고 권유했고 같이 가고 싶다고도 했지만, 하루에 16km씩 매일 걷는 기본 스케줄을 듣고는 모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휴직기간 내내 매일 온몸에 햇볕을 가득 맞으며 걷다 보니 침잠되어 있던 기분도 우울하던 마음도 점차 나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동안 실내에만 갇혀 있느라 비타민 D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었나 보다. 역시 식물이나 사람이나 적절한 광합성은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답답할 때마다 걷는 기분을 내며 스트레스를 해소해 왔는데 재작년 12월 다리 부상으로 작년 1년 동안은 도무지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아서 꽤 고생하기도 했다. 완전하진 않지만 이제 64% 정도는 회복된 것 같다.
지금도 매일 30분~1시간 내로 걸으면서 다시 걷는 감각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처음엔 10분도 힘들었지만 요즘은 30분 정도까지 한 번에 걸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덕분에 머지않은 미래에 또 걷는 기분을 경험하고 싶을 때 어디론가 용기 있게 훌쩍 떠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