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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는 만큼

by Pearl K

주변의 친한 지인들에게 꽤나 부드럽고 다정한 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나의 말투는 사실 보이지 않는 많은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말하는 것을 직접 들어볼 일이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의 말하는 방식에 대해 지적해 주더라도 쉽게 바뀌거나 달라지기가 힘들다.


이십 대 초중반이던 그때의 나는 마치 고슴도치와 같았다. 누군가가 나를 건드릴까 봐 온통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기에 바빴다. 삐쭉삐쭉한 가시투성이였지만, 마음속은 작은 말들에도 쉽게 상처를 받는 여리디 여린 개복치였다. 겉으로는 그런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아마 더욱 센 척을 했던 걸지도 모른다.


서울에 다시 올라와 직장을 구했지만 그곳에서 3개월간 봉급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퇴사 후 노동부에 바로 신고했지만 밀린 월급을 다 받아내는 데까지는 무려 4개월이 더 걸렸다. 나는 밀린 월급을 받을 때까지 두 달이 넘게 매일 그 회사에 전화를 걸어 사장을 도발했다. 지친 사장은 밀린 월급을 줄 테니 그만하라고 했고, 나는 3개월 치의 밀린 급여 전부가 통장에 들어온 걸 확인한 후에야 전화를 그만뒀다.


그렇게 독기로 똘똘 뭉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던 시간들을 보내고 나서 3~4년쯤 지났을 때, 교회 안의 드라마 공연팀에서 서기를 맡게 되었다. 어느 날 공연을 앞두고 멤버들이 다 같이 모여 중요한 회의를 했다. 서기로서 매번 몇 시간씩 필기를 계속하다 보니 팔이 너무도 아파서 그날은 애초에 쓰기를 포기하고 전체 대화를 녹음해 두었다가 다시 듣고 정리하기로 했다.

서기로서 다음 주 모임 전까지 내가 할 일은 회의 내용을 듣고 사람들의 의견을 하나하나 정리해서 드라마팀 카페에 올려주는 거였다. 장장 2시간 30분에 가까운 긴 회의였기에 꼼꼼히 듣고 작성하기 위해 같은 부분을 몇 번씩 반복해서 들으며 내용을 정리했다. 한참 듣는 와중에 계속 묘하게 거슬리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그 목소리는 쉽게 말해 너무나도 싸가지가 없는 말투였다. 그 사람이 발언을 할 때마다 기분이 별로인데 도대체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도 궁금해서 이 인물이 누구인지 찾아보기로 하고 한 명 한 명 녹음된 목소리를 구분하여 듣는데, 순간 그 싸가지 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그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내 말투가 저렇게 싸가지가 없다고?" 그동안 나를 지켜 내려고 애쓰느라 내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꿈에도 몰랐다. 그 목소리가 나라는 자각이 확신이 되자마자 현실감 100%의 타격이 나를 강하게 내리쳤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당시 단장이던 언니에게 전화를 해서 발견한 사실을 고백했다. 언니는 웃으며 "이제 너도 알겠네." 했다.

그날부터 나는 달라지기로 했다. 어린 시절에 내 글씨체가 마음에 안 들어 예쁜 글씨체를 가진 친구의 글씨체를 베껴서 일주일 넘게 연습하여 글씨체를 완전히 바꾸었던 적이 있었다. 마치 그때처럼 부드러운 말투를 위해 따라하고 닮아갈 일종의 교재가 필요했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앤 공주의 말투라던가,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꽃 파는 거리 여자가 히긴스 교수의 지도를 받아 상류층의 말투를 익히게 되는 장면 같은 것을 보고 우아한 말투를 따라 하곤 했다.


딱딱하고 싸가지 없는 말투를 바꾸려고 목소리를 몇 번씩이나 녹음해 가며 세상에서 제일 부드러운 사람이 된 것처럼 우아한 말투를 연습했다. 꾸준한 연습과 노력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어서 조금씩이나마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드라마팀 멤버들의 칭찬과 인정에 힘입어 싸가지 있는 말투로의 개선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나는 전보다는 훨씬 부드럽게 나의 말투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

몇 달 후 또 다른 회의가 있었고 서기 작업을 위해 회의내용을 녹음해서 다시 듣는데 직접 들어도 기존에 비해 내 말투가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노력했던 부분에 대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이런 경험은 무엇이든 노력하는 만큼 바꿀 수 있다는 작은 성취감과 자신감을 내게 심어주었다.


여전히 누군가를 만날 때 친절하게 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약간 방심하면 예전의 딱딱하고 싸가지 없는 말투가 소환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딱딱한 말투로 살 때는 내 삶도 딱딱하고 어려운 지점이 많았는데 부드러운 말투로 신경을 써서 말하면서 삶 자체도 약간은 부드러워지고 말랑말랑해진 것 같아 다행이다.


요즘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전에 하지 않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달라지고 싶다는 마음, 내 상태를 인정하는 자각,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더 이상 과거의 망령에 얽매이지 않고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결심 같은 것들이 바탕이 되어 있는 행동들이다. 노력하는 만큼 유의미한 성과가 나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일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노력하는 만큼의 자신감은 더 생길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오늘도 셀프응원을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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