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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Jun 05. 2023

슬기로운 내 집마련

인생에는 의외의 순간들이 예상보다 더 빨리 찾아올 때가 있는 것 같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기 위해 상경했을 때, 내가 가장 간절하게 바랬던 것은 서울경기권에 어딘가 내 몸을 누일 작은 공간이 하나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렇게 처음으로 구한 방은 벽이 너무도 얇아 옆방에 사는 사람의 생활소음이 그대로 전달되기도 하던 1.2평의 고시원 방이었다. 때로는 누군가의 코골이 소리에 잠을 깨는 일도 있었고, 방을 착각했는지 술에 취한 건지 자꾸만 문을 두드리거나 손잡이가 달각거리기도 했다.

   

   결국 불안한 마음에 이어폰을 꽂고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크게 음악을 들어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때의 소원은 튼튼한 철제대문이 있는 방 다운 방을 갖는 것이었다. 매달 10만 원씩 꼬박꼬박 주택청약 적금을 들었고 3년 6개월 만에 원하던 대로 철제대문이 있는 방에 살 수 있게 되었다.


   반지하여서 여름이면 곰팡이로 흰 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매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문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다세대 주택의 또 다른 세입자에게서 철제 대문으로는 막을 수 없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후로 원룸에 거실이 있는 오르막길 끝의 집을 거쳐 주택가의 투룸과 대학교 후문 옆의 투룸 빌라, 모텔촌이 가득한 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만 나오는 빌라까지 참 다양한 지역에 다양한 형태의 집을 거치며 살아왔지만, 그 어느 곳도 진짜 내 집은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열아홉 살 이후로 18년 만에 다시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세입자로서의 설움은 이미 충분히 겪어봤다고 생각했었는데, 또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전세로 살던 집의 주인할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상속 문제가 얽혀 이도저도 못하게 된 것이다.


   고인이 되신 분의 자녀들이 벌이는 상속분쟁 가운데서 우리의 이사는 점점 더 늦어졌고, 등록금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한 다음에야 겨우 이사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원래 계약했던 예정일보다도 2년 10개월이 더 지난 시점에서야 마침내 첫 신혼집과 이별할 수 있었다.


   계약만료 날짜에 이사를 못하는 사이에 집값은 천정부지로 올랐고, 우리가 가진 것만으로는 도저히 전세조차 구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근처 지역에서 시세가 가장 저렴한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결국 은행의 도움을 일부 받아야만 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한껏 부풀었던 집값은 거품처럼 빠져나갔다. 은행금리가 너무 올라 대출금 이자는 처음 내던 금액의 두 배까지 올라갔는데, 그동안 전세가는 엄청나게 하락하고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무리해서까지 비싼 이자를 내며 지금의 전세를 유지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청약을 기다려볼까도 생각했지만 공급예정인 지역이 과열지구인 데다 주변 시세가 너무 올라 청약이 당첨되더라도 도저히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리는 투자를 위한 집이 아니라 둘이서 실제로 거주할 집이 필요한 것이어서 이왕 은행의 도움을 받을 거라면 갚으면 우리의 재산이 되는 방향이 낫겠다는 것에 남편도 나도 동의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그동안 열심히 모아 왔던 것에, 시간을 들여 갚을 수 있는 범위에서 은행의 도움을 조금 받기로 했다. 지은 지 30년도 넘은 오래된 아파트에 근처에서 가장 저렴한 시세고 넓지 않은 평수지만, 덕분에 우리 부부가 함께 살아갈 생애 최초의 집인 공간을 그렇게 마련하게 되었다.

   

   이사까지 이제 2주 정도 남았다. 뼛속부터 J인 나는 이사를 앞두고 하나부터 열까지 디테일하게 준비하고 신경 쓰느라 바쁘다. 너무 할 일이 많아 조금 피곤하기도 하지만, 살고 있던 동네라 큰 변화가 없음에도 꽤 설레기도 한다.

   

   평생 처음으로 내 집이라는 공간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긴 아직 갚아야 할 게 많으니 일부는 은행 집인가. 모쪼록 모든 과정들이 순조롭게 무사히 진행되기를, 새로운 공간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들을 많이 만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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