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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Jul 16. 2023

흩어진 나날들, 비상을 준비하다

꽤 오랫동안 집중해서 무언가를 쓸 수 있는 물리적 시간과 정신적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것의 문제는 아니었다. 직장에서는 단 몇 분도 다른 생각을 할 여유 없이 그저 주어지는 일들을 처리해 내는데만 급급했다. 머릿속은 언제나 다음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들 뿐이었다.

   

   최근 3년여 동안 빼놓지 않고 매주 2~3편 이상씩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었다는 은근한 뿌듯함은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너무 일을 못하게 해서 힘들었는데, 너무 일이 많으니 그것도 힘들다. 1분 1초가 급박한 일들을 멀티태스킹으로 하루종일 처리해내고 나면 퇴근 이후에는 생각이라는 것을 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AI 로봇처럼 정해진 루틴에 따라 아침에 일어나 강아지를 챙기고 출근준비를 하고, 출근해서 정신없이 일하다가 퇴근하면 잠깐 숨 돌릴 새도 없이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저녁을 준비하고 멍 때리며 TV를 보다가 씻고 잤다. 매일매일 전날과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르지 않은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잠깐 정신을 차릴 것 같으면 내일 출근을 위해 반드시 자야 하는 시간이었다.

   

   때로는 내가 일을 하는 건지 일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멍한 상태로 꾸역꾸역 나의 역할을 해냈다. 정신없이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누군가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나 스스로가 관계 중심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인지 이런 삶이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3월에는 월요일에 글쓰기 모임을, 화요일에는 교회에서 진행하는 어성경 구약과정과 더불어 이미지코칭도 5주간 들었다. 수요일에는 매주 교내 선생님들과의 모임이 있었고, 목요일에는 교재도 없고 자료도 없는 방과 후 수업 준비를 위해 남은 에너지를 탈탈 털어야 했다.


   그나마 집중해서 일할 수 있었던 금요일에는 학교 행사도, 집안 행사도, 가야 할 병원도 많았는데 급작스런 체력저하로 병원까지 갈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일단 집으로 차를 돌린 적도 많았다. 살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처음이었다.


   방학을 하루 앞두고 급박한 일들이 다 정리된 지금에야 지난 5개월간 흩어져 버린 흔적들을 찾아내려고 써 본다. 이렇게라도 남겨놓지 않으면 정말로 사라질 것 같아서, 잘 시간이 훌쩍 넘은 이 새벽에 침대 위에 앉아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지난 5개월 동안 최선을 다해 달린 것 같은데, 결과들이 갑자기 증발해 버린 것 같다.


   매일 SNS에 하루를 정리하여 주절주절 적어두긴 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 모든 날들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이미 흩어져 버린 것 같기도 하다. 인생의 쓴맛을 느끼며 원치 않게 체득했던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오기도 하고, 때로는 별 것 아닌 일을 쉽게 오해하기도 했다.

   

   날아보려고 하면 언제나 발목에 묶인 줄이 잔인한 현실을 깨닫게 하던 시절이었다. 언젠가부터는 내가 묶인 것도 잊을 만큼, 날개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갇혀 있던 그물에서 이제 막 벗어났만, 아직 날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날개 구석구석이 묶였던 흔적으로 욱신거리고 축축하게 젖어 있어 무겁다. 이미 잘린 줄 알았던 날개가 그대로 있다는 걸 확인한 것으로 시작이다. 어쩌면 지난 한 학기 동안 다시 날개를 펼치는 법을 배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단번에 창공을 훨훨 날아오를 만큼 날개를 충분히 펼치기에는 이를지도 모른다. 내 예상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다만 꽁꽁 묶여 있던 날개에 남은 흔적들이 차례차례 낫고, 젖었던 날개도 바짝 잘 말라주기를 바란다. 마침내 준비가 되면 하늘 높이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을 비상의 그날을 기다려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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