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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Sep 07. 2023

자연스럽고 은은하게

오후에 출장이 예정된 날이라 아침부터 분주했다. 급한 업무들을 정리해 두고 부랴부랴 약속 장소로 향했다. 출장 목적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교과연구회였고, 나는 이 모임의 장을 맡고 있다. 도착하자마자 쉴 틈 없이 서명부를 꺼내고 모임을 위한 세팅을 마치고 나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겨우 한숨을 돌리려는 내 눈앞에 불쑥 하얀 상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이게 뭐예요?

 -아까 말했던 거요. 한 번 맡아보세요.

 -우와! 저 주시는 거예요?

 -쓰고 나서 아주 조금 남은 건데 향이 궁금하다고 하셔서 가져와 봤어요.

 -앗! 그런 거였군요. 감사합니다.

 

   오전에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톡방에서 사무실에 두는 디퓨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여러 사람들이 각자가 사용하는 다양한 브랜드와 다양한 향의 제품들을 추천해 주셨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로즈메리, 레몬밤 같은 허브향부터 분위기를 표현한 은은한 향, 달콤한 향, 따뜻한 향 등. 다양한 향기의 이름 중 흔하지 않은 낯선 이름의 향이 있어 궁금해졌었다.


   그건 도대체 무슨 향이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꽃향기가 난다고 간단하게 대답해 주셔서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평소 향수나 방향제 같은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그중에서도 꽃 이름이 붙은 향기는 더더욱 그렇다. 이름에 꽃만 들어가면 재료를 과하게 조향 해서 오히려 역한 냄새가 나는 경우를 많이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양재동 꽃시장’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가진 이 디퓨저의 향기는 그런 흉내 내기식의 과한 향들과는 달랐다. 맡는 순간 생화를 말릴 때 날 법한 향기가 코끝에서부터 은은하게 전해져 오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편안했다. 덕분에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마음껏 향을 들이마실 수 있었고,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도 이 디퓨저를 두고 싶어졌다.


   생각해 보면, 요즘 내가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관계를 맺어가고 싶은 사람들은 이 디퓨저의 향기와 같은 사람들인 것 같다. 친해진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그렇게 서로의 향기를 주고받으며 은은하게 마음을 나누다 보니 편안해졌다. 애써 기분을 꾸미지 않아도,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도 되니 참 좋다.


   이제는 늘 불안해하고 스스로를 부정하던 과거의 나에게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충분히 사랑받을 만하고, 이렇게 소중한 사람들이 주위에 잔뜩 있으니까 말이다. 부드럽고 은은하게 스며들어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좋은 향기처럼, 나도 주변의 고마운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기쁨을 전해주는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바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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