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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Oct 06. 2023

남편이 꼭 봐야 하는 글

결혼하기 전 내 이상형을 적은 목록에는 스포츠를 보지 않는 남자가 있었다. 더 콕 집어서 말하면 야구 중계를 보지 않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다른 스포츠는 그나마 짧은 시간 안에 끝나고 시즌도 길지 않지만, 야구는 가장 날씨가 좋은 타이밍에 내내 하는 데다가 한번 시작하면 9회 말까지 장장 몇 시간을 TV 리모컨을 쥐고 있을 테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대화에 쓸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남편은 야구를 좋아했지만 응원하던 팀의 계속되는 부진과 실패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덕분에 그는 나의 이상형에 충족되는 조건을 자연스럽게 갖추게 되었다. 그는 속 터지는 야구 대신 새로운 취미에 빠져 있었는데 그건 바로 보드게임이다. 학생들과의 다양한 활동이나 수업에 보드게임을 본격적으로 활용하던 타이밍이어서 그의 취미와 나의 필요는 속된 말로 아다리가 딱 맞았다. 남편의 취미 덕분에 내겐 조금 낯설던 보드게임을 친숙하게 경험할 수 있었고, 새롭게 배운 보드게임들은 학생들과의 수업에서 다방면으로 적용해 볼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내가 간과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먼저, 나는 실내보다 실외에서 활동하는 게 좋은 사람인데 보드게임을 진지하게 하려면 실내에서 예상보다 꽤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무리 재미있는 활동이라고 해도 실내에서 버틸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서, 2시간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프기 시작한다. 산소가 부족한가 싶어 바깥에 나가 바람을 쐬고 심호흡하고 돌아와도 30분도 채 못되어 다시 고통을 호소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취미를 나와 몹시 공유하고 싶어 했고, 나도 보드게임이 싫지는 않았으나 하루에 2시간 이상 실내 게임에 참여하는 것은 무리라고 느꼈다. 그는 주말 중 하루나 평일 저녁에 나 대신 함께 보드게임을 즐길 동호회를 찾아 거리에 상관없이 여기저기 다녔다. 그때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한 가지 더 생겼다. 마음에 맞는 동호회를 찾아 보드게임을 하러 한번 가면, 이른 오전에 나가서 자정이 되기 직전에 겨우 집에 도착하는 거다, 심지어 남편이 보드게임을 하는 동안에는 도무지 연락도 받지를 않고 언제 올지도 모르게 함흥차사였다.


   주말에 남편은 보드게임을 하러 가고 집에 혼자 있다가 한 번은 심하게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고가 생겼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다리가 부어올랐고, 통증이 점점 심해져 자차를 이용해 병원 응급실에 방문했다. 아무래도 골절이 된 것 같아서 남편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빨리 와 달라고 말했다. 그는 정리하고 서둘러서 가겠다고 말했지만 내가 장장 3시간 동안 혼자서 진단과 모든 치료를 받고 집에 갈 때쯤에야 겨우 도착했다. 몹시 화도 나고 무엇보다 서운하고 서러운 마음이 크게 들었다.


   사람과 취미를 비교할 수 없는 건 알지만 가끔 남편에게 보드게임이 좋냐 내가 좋냐 하는 유치한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우선순위를 확실히 잡아달라고 여러 번 부탁하기도 했다. 건강한 취미생활이고 사이클, 낚시, 사진 등 다른 취미생활보다는 비용도 훨씬 적게 들지만, 당장 남편을 절실히 필요로 할 때 곁에 없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니 그럴 때마다 이제 적당히 놀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육아를 하게 되면 아무 데도 못 가니까 놀 수 있을 때 놀아두라고 내가 많이 봐주는 중이라는 걸 남편도 알고 있을까가 살짝 궁금해진다.


   당신이 좋아하는 보드게임 가게 해줄 테니까 대신 연락도 좀 받고 내 취미생활인 여행도 그만큼 존중해 줘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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