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멈춰버린 사람들

by Pearl K

무라카미 하루키는 가장 사치스러운 독서는 책의 배경이 되는 장소나 공간에서 그 책을 읽는 것이라고 했다. 덕분에 내게는 새로운 소망이 하나 생겼었다. 이왕이면 좋아하는 책을 배경이 된 도시의 장소나 공간에서 읽고 싶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냉정과 열정 사이를 피렌체 두오모 성당 꼭대기에서,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한밤중의 도서관에서, 상실의 시대를 교토의 아라시야마 대나무 숲에 누워서, 셜록 홈스를 런던 베이커가 221B가 보이는 카페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킹스크로스 역 9와 3/4 정거장에서 읽는 것이다.


작년에 학생들과 함께 추천도서를 카드뉴스로 만드는 활동을 했다. 그때 아이들이 추천해 준 책 중에서 읽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무라세 다케시가 쓴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이 그 책이다. 너무 슬퍼서 읽으면 울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더 궁금해졌다. 입소문을 탔는지 학생들이 한동안 계속 빌려가고 반에서 돌려 읽기도 했다.


올해 여름방학에 갑자기 생각이 나서 읽어보려고 책을 빌렸다. 아쉽게도 바로 읽지를 못하고 침대 옆 협탁에 그냥 두었는데, 시간은 빠르게 흘러 방학이 끝나버렸다. 2학기가 시작하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생각만 하다가 미루어 두고 있었는데 마침 기막힌 기회가 생겨서 그 사치스러운 독서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휴일을 맞아 기차를 타고 친한 동료 샘네 놀러 가기로 했는데, 짐을 싸면서 책도 함께 챙겼다. 여수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벼르고 벼르던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을 읽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배경은 한 열차사고로 시작된다. 열차가 절벽에서 떨어져 120여 명의 승객 중 절반이나 되는 60여 명의 승객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결혼을 앞둔 신부, 퇴사했다는 걸 아버지께 말하지 못한 아들,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한 아이를 잘 챙겨주었던 누나, 열차사고의 가해자로 몰린 기관사의 아내까지. 그들의 삶은 사랑하는 사람을 예상치 못하게 잃은 슬픔 속에서 멈춰 선 채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렇게 몇 달이 흘러간다.


어느 순간부터 사고가 일어난 니시유이가마하 역에서 유령열차를 보았다는 소문이 퍼지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찾아간 이들은 유령 여학생으로부터 유령 열차에 탑승하기 위한 네 가지 규칙을 듣는다. 첫째, 죽은 피해자가 승차했던 역에서만 기차에 탈 수 있다. 둘째, 피해자에게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된다. 셋째, 열차가 마지막 역을 통과하기 전에 내리지 않으면 당신도 사고를 당해 죽는다. 넷째, 죽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고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단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기 위해서 네 가지 규칙을 명심하며 기차에 오르는 사람들. 그들은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랑하는 이들에게 못했던 말을 전한다.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고마웠다고.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나서야 남겨진 사람들은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게 된다. 삶을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30여 년 간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비극들이 생각났다. 성수대교 붕괴와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폭발 사고, 씨랜드 화재사고, 세월호 사건, 1년 전 이태원 압사사고까지. 그 수많은 사고들로 안타깝게 생명을 잃은 이들과 그 유가족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모든 사고에서 사망 직전까지 가족들에게 보낸 메시지들은 전부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라는 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해결해야 하는 이유는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남은 유가족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어떤 일에 대해서든 완전히 다 이해할 수 없기에 타인의 비극을 폄훼해서는 안 된다. 비극적인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제대로 조사한 후, 시스템을 정비하고 안전하게 규제하는 것이 가장 먼저이고, 또 사고 이후 유가족들을 위해 정신적, 물질적 피해지원과 심리상담도 꼭 필요하다.


책을 읽으며 많이 슬펐지만 멈추었던 곳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조심스럽게 새로운 희망도 얻을 수 있었다. 그분들의 삶이 사고가 일어난 그 시간에 멈춰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도록, 계속해서 삶을 이어나가실 수 있도록 사회와 사람들이 더욱 노력해야 할 부분이 아직은 남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 자신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음을. 만일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 당신은 그에게 무슨 말을 전하겠는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