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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Oct 22. 2023

잠들어 있던 추억들을 깨우다

요즘은 디지털카메라가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웬만한 디지털카메라의 화질보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화질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휴대폰이 디카의 화질을 닮고자 했다면, 최근엔 카메라가 휴대폰의 다양한 기능을 닮아가는 추세다. 


   몇 달간 일했지만 제대로 급여를 받지 못해 퇴사한 직장이 있었다. 사회초년생의 코 묻은 돈을 떼어가다니 참지 않고 노동청에 신고했다. 노동부의 지급요청에도 불구하고 차일피일 급여지급을 미루던 사장을 2달간이나 집요하게 매일 전화해서 진상을 부린 후에야 3개월 만에 겨우 밀린 월급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돈으로 파나소닉에서 새로 나온 디지털카메라를 구입했다. 당시 필름카메라로 유명했던 라이카의 렌즈를 사용한 디지털카메라로 필름카메라와 같은 느낌이 나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광고하던 제품이었다. 꽤 오랫동안 그 카메라를 가는 곳마다 들고 다니며 많은 사진을 찍었다. 2008년에 혼자 떠난 첫 일본 도쿄여행에서도 내 카메라와 함께 했었다.


   휴대폰이 점점 더 발달하면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더 이상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항상 들고 다니는 휴대폰으로 찍으면 확인하기도 쉽고, 마음에 안 드는 사진을 쉽게 지우기도 편했다. 딱 한 가지 문제점은 사진을 보관할 용량이 충분하지 않다는 거였다. 외장메모리나 SD카드를 사용하여 부족한 용량을 보충할 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사진이 일정량 쌓이면 안전하게 파일로 바꾸어 저장하고 보관해야 한다는 거였다. 


   난감한 것은 저장매체가 계속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플로피 디스크에서 CD로, USB로, 외장하드로. 변화에 따라 파일의 형식도 조금씩 달라졌고 이전 버전과는 호환되지 않아 아까운 사진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사진을 보관할 다른 방법을 찾다가 당시 유행하던 싸이월드 미니홈피 사진첩에 사진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상에 있으니 계속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당 사이트의 운영이 중단되면서 그 시기의 사진들이 모두 사라질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 사이 스마트폰은 더 발달했고, 각종 SNS가 활성화되면서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을 거쳐 인스타그램까지 다양한 플랫폼이 생겨났다. 나는 여전히 휴대폰에 사진이 쌓이면 몇 달에 한 번씩 혹은 6개월에 한 번씩 사진들을 블로그와 외장하드, 자동 클라우드 업데이트 등을 사용하여 정리한다. 아무리 바빠도 꼭 한 번은 시간을 내어 지난 추억들을 업데이트하고 기록으로 남겨놓는 편이다.


   두어 달 전 사진첩을 보다가 휴대폰에 이미 5천 장이 넘는 사진들이 가득한 것을 알게 되었다. 정리해야 할 시기가 한참 지났는데도 시간이 없어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날을 잡아 정리를 해야지 생각만 하다가 시기를 놓쳤다. 더 이상은 안될 것 같아 일단 할 수 있는 만큼이나마 정리하기로 했다.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은 공간이나 여행의 추억 같은 것들은 블로그에 모아서 포스팅하고, 휴대폰 사진첩에 보관해 둘 사진은 앨범을 세분화해서 나누어 정리했다. 


   사진을 정리하는 건 지난 1년 간의 추억을 하나씩 정리 정돈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새롭게 이직하며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지나간 봄과 여름, 첫 방학다운 방학에 가고 싶었던 장소들을 탐방하면서 느꼈던 설렘. 동생과 봉봉이와 함께 다녀온 짧은 여행, 가장 최근에 남편과 둘이 다녀온 때늦은 여름 아닌 가을휴가까지. 


   사진 속에 담긴 내 표정은 어색했고 장면들은 익숙한 듯 낯설고, 풍경들은 새롭지만 아름다웠다. 미어터질 듯 가득 차 있던 사진첩을 정리하며 비워내고 나니 비로소 해결 못한 과제를 완수해 낸 것처럼 후련해진다. 앞으로 남아 있는 2023년의 가을과 겨울에는 어떤 추억들을 사진으로 남기게 될까. 또 몇 달 후에 다시 사진첩을 정리해야 하는 날이 오면 그때서야 확인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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