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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Nov 13. 2023

너는 나의 헵시바

막연하게나마 어릴 때부터 꿈꿔 온 결혼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건 결혼예식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전심을 다해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는 환상에 관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읽었던 대부분의 동화 속에서 마지막 장의 마지막 문장은 비슷했다. 바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They lived happily and for a long time)" 수많은 동화들을 읽으면서 그 문장 속의 삶이 나의 것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예상보다 혹독하고 참혹했다. 자존감이 솟구치고 자신감이 넘치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날들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바닥 아래 지하땅굴을 판 자존감을 느끼고,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내팽개쳐졌다고 느껴지는 날들도 많았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 티끌만큼 남은 자존감은 완전히 바스러져 사라져 버렸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럽기만 했다.

 

   초반에는 그나마 작은 희망을 가졌지만, 시간이 가고 나이가 들수록 희망은 점점 나와는 상관없는 단어가 되어갔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나를 데려가 달라고 여러 번 기도했고, 스스로 나의 삶을 끝낼 수 없는 이유는 용기가 부족해서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 모든 생각들은 완전히 틀렸다.


   지속된 허리통증과 안압이상으로 계속 집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다가, 오늘 꽤 오랜만에 현장예배에 참석했다. 오늘 설교의 본문 말씀을 읽는 순간 너무 눈물이 났다. 주일 설교 말씀의 제목은 '너는 나의 헵시바'였다. 헵시바란 "넌 나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나는 모두에게서 버림받았다 여겼다. 이렇게까지 제멋대로에 엉망진창인 모습은 하나님도 용서하고 싶지 않을 거라며, 악한 사단의 속삭임에 속아 내가 나를 정죄하고 미워했다.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그렇게 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새로 배울 수 있어 감격스러웠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동안에도 "You are my Hephzibah. 너는 빛날 거야, 넌 나의 기쁨이고 가장 아름다운 왕관이며, 나의 자랑이야"라고 내게 끊임없이 말씀해 주고 계셨다는 것이 온 마음으로 믿어졌다.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내게 가장 큰 인정과 격려를 계속해서 부어주고 계셨다.


   인생의 결핍이 찾아왔을 때 좌절하는 이유는 내가 정확히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불안하고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예뻐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다. 이사야 62장 4절에서는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않겠고,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않겠다."라고 선언한다.


   제일 중요한 핵심을 잠시 잊었었다. 애초에 희망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소망을 두어야 할 곳은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자랑스러워하고 사랑스러워하고 가치 있게 여겨주신다는 사실은 굉장한 일이다. 찌질하고 보잘것없는 우리의 삶이 의미 있고 특별해지기 때문이다.


   나조차 포기한 나인데 하나님은 나를 떠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셨다. 날 대신해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죗값을 치르셨고, 죽을 수밖에 없던 나를 살리시고 용서해 주셨다. 무너진 나를 일으키시고 텅 비어버린 존재를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주셨다. 그분은 그렇게 세상의 가장 약한 것으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전심을 다해 존재 자체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결혼하겠다고 결심했었다. 기대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었는데, 살다 보니 순간순간 내가 기대했던 모습과는 다른 점이 꽤 있었다. 첫 마음과 달라진 것 같아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었다.


   내가 바란 사랑이 인간의 수준에선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런 수준의 사랑이 가능한 유일한 분은 하나님뿐이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전심을 다해 존재 자체로 나를 사랑해 주고, 포기하지도 떠나지도 않는 무한한 사랑을 이미 받고 있었던 거다. 이걸 깨닫고 나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아이가 생기길 기다리면서 하나님이 주셨던 약속은 "내가 너에게 기쁨을 줄게."였다.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 힘들었다. 기쁨을 주신다고 해 놓고 슬프게만 하신다고 원망하기도 했다. '너는 나의 기쁨'이라고 말씀으로 확언해 주시니 감사하다. 이제라도 그분의 헵시바답게 살고, 나도 하나님이 주시는 완전한 기쁨을 얻으며 살아가고 싶다.


   너는 나의 헵시바, 나는 주님의 헵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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