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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Nov 24. 2023

도로 위의 빌런들

나라는 사람은 본래 규칙이나 규정은 배운 그대로 지키는 편이다. 도로 운전 연수를 받던 중의 일이다. 도로 주행 시험은 A~E까지 총 5개의 코스 중에서 정해졌다. 연수 중에는 모든 코스를 최소한 두 번 이상씩 돌며 어떻게 운전하는지를 배웠다. 무면허 상태로 연습을 하는 것이라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돌발상황을 대비해서 바로 옆에 운전 학원 강사님이 타고 계셨다.


   학원을 출발해서 B코스를 연습 중이었다. 눈앞에 횡단보도가 나타났고 나는 우회전을 해야 했다. 보행신호에 초록불이 들어왔길래, 우측 깜빡이를 켠 상태로 자연스럽게 멈췄다. 한참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어서인지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횡단보도의 카운트 다운이 20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긴장하며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강사님이 차를 출발시키라고 하셨다.


   "아직 초록불인데요?" 하고 대답했더니, 사람이 없으면 가도 된다고 하셨다. 보행자로 거리를 걸어 다닐 때, 보행신호를 무시하고 무작정 우회전하는 차들에 놀란 적이 많았다. 우회전이라고 해도 초록불에 진행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사람이 뛰어올 수도 있으니 기다리겠습니다." 했더니 강사님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셨다. 당연히 지켜야 할 규칙을 지키지 말라고 하는 강사님이 이해되지 않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신호가 바뀌고 나서야 나는 클러치를 밟고 기어를 바꾸며 출발했다.


   중고차를 구입한 후, 셀프 연수가 끝나고 운전에 조금 자신감이 붙었을 무렵의 일이다. 친한 선생님이 육아휴직 중이어서 하루 날을 잡아 놀러 가게 되었다. 집에서 15~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운전 쌩초보에게 그 거리는 거의 만리장성 급이었다. 무사히 운전하여 도착해 재미나게 놀다가, 예상보다 조금 늦게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지상 지하철역 앞에서 좌회전해서 고가 도로 옆길을 따라 올라오는 구간이 있다.


   지하철역 앞은 평소에도 워낙 오가는 차량이 많아 차선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당시 시간은 5시 30분 전후로 퇴근길 러시아워가 시작되기 직전이라 차량이 사정없이 늘어난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눈치를 보며 잘 끼어들어서 2차선까지는 도착했는데, 좌회전하려면 한 번 더 끼어들어 1차선으로 진입해야 했다. 하필 날이 캄캄해지고 있어서 더 긴장되기 시작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차들을 백미러로 곁눈질하며 왼쪽 깜빡이를 켜고 끼어들 기회를 살폈다. 몇 분 정도 지나서야 겨우 틈이 생겼고 나는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백미러가 힘없이 꺾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뒤에서 트럭이 와서 그대로 내 차 좌측 백미러를 들이받은 거였다. 트럭 아저씨는 내게 아래로 휙휙 손짓했다. 벌벌 떨며 창문을 내렸더니 화를 내며 “아줌마! 지금 뭐 하는 거야. 에이씨 진짜. 이번에는 봐줄 테니까 다음부터 조심해!” 하고는 쌩 가버렸다.


   초보였던 나는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거듭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다시 돌아보니 나는 좌측 깜빡이도 켰고, 백미러도 확인 후 충분한 여유를 두고 진입했다. 오히려 갑자기 나타난 트럭이 안전거리 미확보를 한 상태였다. 쌩초보 운전에 첫 사고의 충격으로 워낙 정신이 없었고 당황했던 틈을 타서 트럭 기사 아저씨에게 속은 기분이다. 망가진 백미러에 대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트럭을 그냥 보낸 것이 지금 생각하면 못내 억울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는 밀려드는 차들로 2차 사고가 날 것 같아 일단 어떻게 해서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했다. 비상등을 켜고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천천히 1차선 진입을 시도했다. 감사하게도 차 한 대가 기다려주셔서 무사히 진입 후, 집 근처의 한산한 도로까지 이동한 후 우측 끝 갓길에 차를 세웠다. 비상등을 켜고 보험회사에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보험회사는 곧 출동하겠으니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렇게 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싼 값을 치르고 인생의 교훈을 배웠다.


   사고 이후에는 조금 무섭기도 했고, 차선을 바꾸어야 할 때면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내가 아니면 운전할 사람이 없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더욱 안전하게 운전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도 도로 위를 다닐 때마다 살짝만 삐끗해도 크고 작은 사고의 위험들에 늘 노출되었다. 도로 위는 한 마디로 정글이었다.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본 교통법규와는 또 다른 정글의 법칙을 배워야 했다.


   도로 위 정글의 법칙을 배운 후에도 도로 위의 빌런은 늘 있었다. 운전경력이 오래된 분들은 깜빡이를 아예 안 켜고 끼어들거나 우회전, 좌회전을 하시는 분이 대부분이었다. 깜빡이를 켜더라도 몹시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슬라이스를 치며 차선을 옮겨 다니는 차도 있었다. 한 번은 스타필드 앞을 지나는데 그날따라 도로 위에 차가 없었다.


   서울에서 나오는 길이라 1차선을 타고 있었는데 2차선으로 이동해야 했다. 백미러로 뒤쪽을 확인한 후 우측 깜빡이를 켜고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도시가스를 실은 트럭 한 대가 5차선에서 2차선까지 무려 3차선을 한 번에 넘어오며 비키라고 빵빵거렸다. 나는 오른쪽으로 틀던 핸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도시가스 트럭은 계속해서 경적을 울리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어안이 벙벙하고 화도 났다. 분명 내가 잘못한 건 아니었는데 길거리에서 다짜고짜 뺨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일들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났다. 보행신호가 켜져 있어서 대기 중인데 뒤에서 경적을 울려대는 차들, 횡단보도 초록불이라 보행자가 건너는 중인데 그 사이로 위험하게 곡예하듯 빠져나가는 오토바이들. 비보호는 초록불일 때 가야 하는데, 빨간불에 위험한 좌회전을 하는 차나 유턴 구간이 아님에도 불법 유턴을 하는 차도 보았다. 또 음주운전 관련 기사가 뜰 때마다 모두가 매일 얼마나 큰 위험을 부담하고 있는지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위험천만한 도로 위의 정글을 경험하며 5분 빨리 가려다가 50년 먼저 간다던 안전운전 독려 캠페인이 떠올랐다. 그저 조금씩 서로 양보하고, 지켜야 할 교통법규는 꼭 지키는 것. 교통신호에 따라 알맞게 운행하는 것, 차선변경 시 미리 깜빡이를 꼭 켜주는 것. 그 사소한 규칙들만 지켜주면 누구나 도로 위의 정글에서 각자의 안전함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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