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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Dec 05. 2023

두 대의 엘리베이터

가면 갈수록 쓰는 게 어려워진다는 말이 무엇인지 요즘 절감하고 있다. 아까부터 한참을 앉아 키보드 자판을 두들겨도 이렇다 할 쓸 거리가 없다. 생각나는 것들을 검색하고 문장으로 만들려고 노력해 보아도 어쩐지 허공에 흩어지는 말들만 가득한 것이 아무래도 오늘은 슈퍼패스를 써야 하는 날인가 싶다. 


   영 진도가 나가질 않아 답답한 마음에 한 시간 남짓 쓰던 글을 버려두고 일어났다. 본래 무엇이 막힌다 싶으면 설거지하는 버릇이 있다. 시원한 물에 손을 담그고 뽀득뽀득 그릇들을 씻어내다 보면 어느새 기분이 상쾌해진다. 스트레스가 좀 더 쌓이면 설거지에 집 안 대청소까지 당장 할 일 목록에 추가된다. 깨끗이 설거지해 두고, 집 안 청소까지 모두 마친 후 먼지로 가득한 나까지 씻고 나면 그제야 좀 개운해지는 것 같다. 오늘은 다행히 1단계에서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지저분한 싱크대를 깨끗이 정리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집을 나서기로 했다. 감기 기운이 있어 오늘 산책을 패스했었다. 내가 나가는 걸 귀신같이 눈치챈 우리 집 강아지는 같이 가겠다고 찡찡거린다. 찬바람으로부터 목을 보호해 줄 마스크를 장착하고, 9kg이나 나가는 강아지를 한쪽 어깨에 얹고 나니 준비 끝이다. 물티슈 몇 장으로 음식물 쓰레기봉투 끝을 위태롭게 잡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간다.


   우리 아파트에는 두 대의 엘리베이터가 있다. 버튼의 센서를 하나로 연결하는 공사 후부터 어떤 버튼을 눌러도 가까운 쪽의 엘리베이터가 먼저 움직인다. 우리 집은 17층인데 엘리베이터는 각각 19층과 16층에 있다. 이번에는 한 층 아래인 16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왔다. 양손이 자유롭지 못한 채로 엘리베이터에 탔고 1층을 누르자 문이 닫혔다. 


   맙소사! 엘리베이터 안에 담배 냄새가 가득하다. 누군가 1층 야외에서 담배를 피운 뒤, 바로 엘리베이터를 탔던 건지, 아니면 마지막으로 삼킨 한 모금의 연기를 그 안에서 내뿜은 건지 독한 담배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어 몹시 불쾌해졌다. KF95 촘촘한 마스크를 착용했음에도 쉽사리 참아지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다. 1층에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숨을 참으며 담배 냄새를 조금이라도 덜 흡입하려고 애를 쓴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도망치듯 뛰어나왔다. 차갑지만 청량한 바깥공기를 마시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무사히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왔더니, 아까 그 엘리베이터가 여전히 1층에 있다. 버튼을 누르면 분명 같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먼저 열릴 테니 집이 있는 층에 도착할 때까지 또 그 냄새를 참아야 하는 건가. 고민하다가 꼼수를 쓰기로 했다. 


   버튼을 누르자 예상대로 담배 냄새 가득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먼저 열렸다. 나는 문 사이로 살짝 고개를 집어넣어 20층을 누르고 빠져나왔다. 잠시 후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20층을 향해 출발했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고 나서 다시 버튼을 눌렀다. 아까 19층에 정차해 있던 엘리베이터가 이제야 1층을 향해 움직인다. 적어도 담배 냄새를 다시 맡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잠깐의 기다림이 오히려 즐겁기까지 하다. 


   다시 1층,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코를 킁킁거려 본다. 확실히 아까보다 공기가 상쾌하다. 적어도 담배 냄새는 안 날 것 같다. 그때 문이 닫혔다. 강아지를 양팔로 안아주며 장난을 치고 있는데, 어라? 이번에는 다른 냄새가 난다. 아니 이건 향기에 가깝다. 아까까진 애써 숨을 참았던 내가 지금은 코를 벌름거리며 이 좋은 느낌의 향을 조금 더 맡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말이다. 


   코끝 가득 밀려 들어오는 냄새는 바로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양념치킨 냄새였다. 아마도 누군가가 야식을 배달시켰나 보다. 배달하시는 라이더분이 방금 다녀간 듯 엘리베이터 안은 고소하고 달다구리 한 냄새로 꽉 차 있었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냄새다. 이 밤, 어느 집에서는 가족들의 치킨 파티가 열렸나 보다. 같은 아파트에 설치된 두 대의 엘리베이터에서 풍기는 두 가지의 냄새는 내게 상반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한 설법 중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향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묶은 새끼줄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난다.” 처음 들었을 때는 되게 당연한 말을 되게 멋있는 척하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했었다. 비슷한 일을 엘리베이터 버전으로 직접 경험해 보니 해석하는 시선이 달라졌다. 나는 어떤 냄새를 풍기고 있을까? 내가 탔던 엘리베이터나 사용했던 공간에는 어떤 냄새가 남아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두 가지의 다른 냄새를 풍기는 두 대의 엘리베이터 덕분에 슈퍼패스 대신 글을 쓸 소재가 생겼다. 역시 이 타이밍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기뻐하고 있다. 부처님의 명언을 오늘 나의 엘리베이터 버전으로 바꾸어 써 보며 글을 마무리한다. 


   "흡연자가 탑승했던 엘리베이터에서는 담배 냄새가 나고, 치킨 배달 라이더가 탑승했던 엘리베이터에서는 치킨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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