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나는 꽤나 계획적인 사람이다. 대부분의 생활이나 일정을 미리 계획해 두다 보니, 예상치 못하게 갑작스럽게 닥치는 일이나 상황 앞에서는 버그에 걸린 로봇처럼 버벅댄다.
일을 하면서도 가장 힘든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보통 업무의 진행순서나 몇 교시에 그 일을 처리할 지도 다 정해두는데,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가 있으면 난감해진다. 특히 사전에 협의나 양해도 없이 임의로 당장 장소를 사용한다며 밀고 들어오면 화부터 난다. 애써 마음을 다스려 보아도 가장 잘 되지 않는 부분 중 하나다.
그런 내가 망설이지 않고 즉흥적으로 돌진하는 경우는 정말 좋아하는 걸 할 때뿐이다. 어제는 점심시간에 봉사하러 온 도서부 채윤이와 이야기를 하는데, 주말에 콘서트를 보러 간다고 자랑을 했다. 누구 콘서트냐고 했더니 무려 AKMU의 콘서트라고 했다.
2012년에 Kpopstar 2를 악동뮤지션 때문에 보기 시작해서, 전체 회차 정주행을 했었다. 결국 1등을 하고 YG에서 앨범활동을 시작한 악뮤가 첫 앨범 The Play를 냈고, 서울숲에서 열린 첫 청음회 공연에 당첨되어 갔었다. 페스티벌들은 못 갔지만 나름 악뮤의 전국투어 콘서트는 빠지지 않고 갔었던 팬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몇 달 전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악뮤토피아(AKMUTOPIA)" 콘서트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못 가보게 되어 피눈물을 흘렸다. 정신없이 지내는 동안에 미처 모르고 있다가 이번 공연이 전국투어이고 내가 사는 곳 근처에서도 공연을 한다는 걸, 무려 공연 하루 전날 알게 된 것이다.
이미 티켓이 매진되었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당장 티켓예매 사이트부터 접속했다. 다행히도 4 구역에 10여 개, 8 구역에 2개 정도의 자리가 남아있었다. 평소에는 전시장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라 단차가 아예 없는 곳에서 공연을 하는 거였다.
잘 보이는 좌석은 아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시간이 없었다. 일단은 콘서트를 가는 게 중요했다. 어떤 좌석이 가장 좋을지 고민하다가 더 이상 늦어지면 그나마 남은 좌석마저 사라져 아예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단 8 구역 1열의 자리를 선택했다. 그건 아주 현명한 결정이었다.
집에서 50분 전후로 소요되는 거리라 조금 여유 있게 1시간 반 정도 일찍 출발했다. 공연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로 발 디딜 틈이 부족했다. 화장실 줄을 기다리는 것이 한 세월, 야광봉과 굿즈 줄을 기다리는 것도 한 세월이었다.
공연장에 입장하는 것조차 가도 가도 끝도 보이지 않는 줄을 끝까지 따라가서 섰는데, 겨우 공연시작을 1분 남기고 아슬아슬하게 입장할 수 있었다. 입장 줄이 길어서 공연은 정해진 시간보다 10여분 늦게 시작되었다. 다음은 공연을 보면서 적은 song list를 바탕으로 작성해 본 공연 후기다.
조명이 모두 꺼지고 이찬혁 솔로앨범인 '파노라마' 테마음악이 흐르면서 찬혁이 등장, 이어 '후라이의 꿈' 연주가 나오며 수현이가 등장했다. 첫곡은 올해 음악방송에서 가장 길게 1위를 했던 곡 'Love Lee'였다. 사랑스러운 투샷으로 보여주는 댄스를 챌린지 모드로 따라 추며 함께 응원했다.
다음 곡은 악뮤 '항해' 앨범에 실려 있는 곡 '물 만난 물고기'였다. 이 노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사 "우리가 노래하듯이 우리가 말하듯이 우리가 헤엄치듯이 살길 Live like the way we sing"를 들으며 추위를 잊었다. 세 번째 곡은 '사춘기 하' 앨범에 실린 '리얼리티'라는 곡이었다. 단어의 말맛이 탱글탱글하게 살아있는 곡이기도 하다.
귀여운 인사에 이어 들려준 곡들은 여러 가수들과 피처링을 한 곡만을 모은 'The next episode' 앨범의 '째깍 째깍 째깍', '전쟁터', '낙하'였다. 원래는 빈지노와 이선희, 아이유가 피처링한 곡이지만 악뮤의 목소리로 다 들려주었다. '째깍 째깍 째깍' 다음 곡으로는 '항해' 앨범의 '고래'를 불러주었는데, 너무 다 좋아하는 곡이라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이외에도 'Stupid Love song', '맞짱', '파노라마', '뱃노래'가 이어졌고, 잠시 후 본격 귀호강 곡 '사랑상실증'에 이은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를 들을 수 있었다. 어찌나 절절한지 눈물이 살짝 맺힐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그 외에도 중간중간 귀여운 멘트와 신박한 영상들로 분위기를 바꾸던 악뮤였다. 멀티버스까지 등장할 줄이야.
Happening'을 섹시버전으로 부르더니 관객들을 모두 일으켜 세워 함께 뛸 수 있는 노래들로 달리기 시작했다. 'Dinosaur',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다리 꼬지 마', 'Give Love', '200%'까지 같이 부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한참 신나게 놀아서 이제 막 텐션이 올랐는데 갑자기 마지막 곡을 부른다고 해서 당황스러웠지만, 우리에게는 앵콜이 있으니까.
앙코르 전 마지막 곡은 '오랜 날 오랜 밤'이었다. 이번에 놀랍게도 관객들에게 1절 전체를 양보했다. 오랜 날 오랜 밤을 관객들이 모두 함께 악뮤에게 불러주는 느낌이라 뭉클해졌다. 그다음에는 약간의 블랙아웃 후에 앵콜이 이어졌는데 예상치 못했던 노래들을 들을 수 있어 더 좋았던 시간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급히 가느라 드레스 코드가 있다는 걸 미처 몰랐는데, 오늘의 드레스 코드는 무려 핫핑크였다. 맞춤으로 야광봉도 핑크색으로 콘서트 이름이 쓰여 있었다. 어차피 핑크색 옷이 내게는 없어서 못 입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진심을 다해 핫핑크 드레스 코드에 맞는 다양한 의상들을 착장하고 왔다.
우아하신 날개 달린 공주님부터 오징어 게임 간수 분장, 요정자매, 아기돼지 아닌 아기토끼 세 자매, 헤드셋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핑크로 도배하신 남자 관객, 마미손 코스프레를 하고 오신 관객 등 정말 다양한 핑크가 가득해서 더 재밌었다. 수많은 관객들과 함께 한 목소리로 한 마음으로 공연을 즐길 수 있어 참 좋았다.
하루 전날 급 예매한 티켓이지만 안 봤으면 어쩔 뻔했나 싶게 눈물 나고 감동적이고 사랑스러운 공연이었다. 자꾸만 지나치게 멋있어지는 찬혁이와 너무 귀엽고 이쁜 수현이를 실컷 보고 귀가 황홀해지는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지하철까지 이 추위에 20여 분을 걸어야 했지만 영상과 밴드의 라이브 연주, 악뮤의 목소리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콘서트를 볼 수 있어 행복하고 신이 났다. 덕분에 잔뜩 쌓인 업무 스트레스를 모두 날릴 수 있었다. 오늘은 정말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