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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하면 신의 얼굴 보리

by Pearl K

한두 번 관극 작품도 아닌데 신기하게도 오늘의 공연은 무언가 달랐다. 모든 대사와 넘버와 동작들이 각각의 의미를 담고 내게 다가왔다.


노래의 가사 하나하나를 단어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다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배우들의 몸짓과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표정 같은 것들이 슬로모션을 보는 것처럼 장면마다 생생하게 들리고 느껴졌다. 그래서였는지 보는 동안 서너 번 넘게 마음이 울컥울컥 하며 눈물이 고였다.


어릴 적 세계명작전집에서 '장발장'이란 제목으로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었다. 무대 위에서는 10년 전 국내 초연된 레미제라블부터 시작하여, 8년 전 재연에 이어 영화로 만들어진 레미제라블과 이번 3연까지 이미 너무도 익숙한 스토리다. 그럼에도 한 장면 한 장면이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굉장히 새롭게 느껴졌다.


노예와도 같은 죄수생활을 19년 동안이나 하고 겨우 벗어난 장발장은 가는 마을마다 전과자라며 배척을 받게 된다. 나를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향한 증오와 악만 남아있던 장발장은 자신을 흔쾌히 재워 준 신부의 호의를 믿지 못하고, 성당의 은촛대를 훔쳐 달아난다.


신부님은 "그분 말이 맞아요. 내가 이 은촛대를 선물로 줬어요." 하며 순경들에게 잡혀 개처럼 묶여 끌려온 그의 손을 풀어준다. 사람들이 떠나고 신부님은 장발장의 영혼을 위해 신의 은총을 빌어준다. 증오로 가득하던 그는 값없이 베풀어 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고 큰 혼란에 빠진다.


시간이 흐르고 그는 다른 인물, 신부가 선물해 준 은촛대를 기반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 부를 지닌 공장장이자 명망 높은 인격으로 한 도시를 책임지는 시장의 역할까지 맡고 있다. 그때의 혼란이 장발장의 분노를 잠재우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살아갈 계기를 준 것일까.


달라진 장발장은 자신의 외면으로 공장에서 쫓겨나 창녀로 살다 병에 걸린 판틴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그녀의 유언을 받들어 판틴의 딸 코제트를 데려다가 사랑으로 키운다. 한참 시간이 흘러 장발장이 코제트를 위해 청년 마리우스를 구해내려 할 때 '만약 내게 아들이 있었다면 이 청년과 같지 않았을까'라고 노래하는 것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세상 모두가 장발장을 외면할 때, 신부가 사랑의 손을 내밀어 준 순간 그는 달라졌다. 그의 변화는 판틴에게 소망을 전달했고, 코제트와 마리우스, 마지막으로 자베르에게까지 전해졌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베푼 사랑으로 시작된 일이라는 연결성을 작품 전반에서 계속 느낄 수 있었다.


브런치 구독 중인 봄날 작가님이 최근에 쓰셨던 '짙은 어둠도 작은 불빛 하나에 물러서고 만다'는 제목의 글이 있는데 오늘 본 레미제라블에서 말하는 이야기가 결국은 같은 지점이 아닐까. 레미제라블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소임을 다한 장발장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가 코제트에게 피해를 줄까 봐 홀로 죽음을 맞이하려 한다.


주 앞에서 내 영혼을 받아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노인 장발장에게 천사 같은 판틴이 나타난다. 그 순간, 자신을 살린 생명의 은인이 장발장이었음을 깨닫게 된 마리우스가 너무도 그리웠던 코제트와 함께 그를 찾아온다. 사랑하는 이들의 품에서 행복하게 숨을 거두는 장발장의 마지막 대사 "그 누군가를 사랑하면 신의 얼굴 보리"가 전체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로 마음에 와서 깊이 콕 박혔다.


"내가 천사의 말한다 해도 내 맘에 사랑 없으면 / 내가 참 지식과 믿음 있어도 아무 소용없으니 / 산을 옮길 믿음이 있어도 나 있는 모든 것 줄지라도 / 나 자신 다 주어도 아무 소용없네 / 사랑은... 영원하네"

레미제라블을 다 보고 김문정 감독님의 지휘가 끝나는 것까지 본 후, 집에 오는 길에 얼마 전 SBS 커튼콜에서 했던 판틴 역 조정은 배우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이번 레미제라블 삼연 연습 때, 오리지널 작품의 연출님이 오셔서 작품 전반의 의미와 각 배역들이 끝까지 추구해야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셨다고 했다. 무엇보다 사랑을 가지고 행동하라는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공연이 왜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울컥거리게 했는지 인터뷰를 보며 그제야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보러 가고 싶다. 그땐 맨 앞자리에서 배우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관찰하며 더 깊은 감동을 받고 싶다. 2023~2024 레미제라블 공연은 6호선 한강진 역 앞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3월 10일까지 이어진다고 하니 더 늦기 전에 찐 감동을 누릴 기회를 잡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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