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아주 어릴 적의 눈에 관한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아직 포항에 살 때, 어린 내 허리춤까지 눈이 쌓인 적이 있었다. 한 걸음을 떼기 힘들 만큼 잔뜩 내린 눈밭에서 옷이 다 젖도록 뛰어놀았었다. 빨랫거리가 왕창 생겼다며 엄마에게 잔뜩 혼이 났지만, 눈 속에서 노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새로 이사 간 동네에는 눈도 거의 내리지 않았을뿐더러, 눈이 오더라도 밟힐 정도로 쌓이는 일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 이유는 눈이 조금만 쌓일라치면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이 불어 쌓이기 전에 다 날아가거나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바다를 메워 공장을 세운 동네에서 바다를 지척에 두고 살았기에 함박눈이 오면 좋겠다는 내 소원은 그 동네에서만큼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다.
집을 떠나 대학교 1학년 때 마주했던 새벽 세 시의 함박눈은 추웠지만 너무도 예쁘고 아름다웠다. 대학생 때까지는 눈이 내리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졸업 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또 하나의 기대는 겨울에 눈을 많이 볼 수 있겠다는 거였다. 그건 철없는 생각이었다. 장거리 출근에는 날씨가 무엇보다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였다.
내가 타야 하는 지하철 1호선은 야외 역사가 많아서 눈이 너무 많이 내리면 지하철이 전부 연착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쩌다 한 대가 오더라도 공기조차도 끼어들 공간이 없을 정도로 미어터지는 상황이었다. 온몸을 구겨 넣어 겨우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에 내리면, 이번에는 딱 한 대뿐인 마을버스가 도착할 생각조차 없었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다가 차가 언덕을 넘지 못해 출근에만 3시간이 걸린 일도 있었다.
그렇게 쌓이는 눈으로 인해 여러 번의 출근 대란을 겪다 보니 눈이 쌓이는 게 점점 더 싫어졌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바라면서도 눈이 적당히 내리고, 출근하기 전에 다 녹아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눈이 내리고 애매하게 녹은 상태에서 날씨가 갑작스럽게 추워져 빙판이 되면 길을 걷는 자체가 너무 무서워졌다, 눈이 싫어지면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거라던 말도 떠올랐다.
2023년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오늘,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물들었다. 대설주의보가 내렸고 아침부터 오후까지 멈추지 않고 눈이 계속 내렸다. 집 안에서 보는 눈은 여전히 예뻤지만, 내일의 일정들이 조금씩 걱정될 무렵 다행히 눈이 그쳤다. 바깥에서는 그제야 아이들의 노는 소리가 들려왔고, 날이 따뜻해서인지 가득 뿌린 염화칼슘 때문인지 많은 이들의 수고로움 덕분에 도로 위의 눈은 안전하게 녹았다.
MBC 연기대상을 보는데 최우수 여자연기자상을 받은 이세영 배우가 그런 말을 했다. 날씨로 인해 내일 2023년의 해가 지는 것은 볼 수 없지만, 새해에는 날씨가 좋아져서 2024년의 첫 태양이 뜨는 장면은 볼 수 있다고. 2023년의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은 잊고 2024년 새 희망으로 가득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올해는 크리스마스 전날도 그렇고, 새해를 이틀 앞둔 오늘도 그렇고 하얀 눈이 내려와 온 세상을 덮어주었다. 이제까지 괴로웠던 일들을 눈과 함께 녹여 시원하게 흘려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눈보다 하얗게 변한 세상을 보며 2024년에는 힘겨운 날보다 행복한 날이 더 많아지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