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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Feb 01. 2024

숨 쉴 구멍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별다른 문제없이 취직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두 학번 위의 선배들까지만 해도 졸업 후 오래 지나지 않아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 있었다. 그러니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아예 직장을 못 찾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 IMF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피부에 와닿지 않아 간과했던 거다. 1~2년 차이가 무섭게 막상 우리가 졸업을 앞둔 상태가 되자, 취업 현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취업할 회사를 찾기도 쉽지 않았지만, 애초에 정규직이라는 개념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취업공고에 올라오는 모든 일자리는 단기계약직이나 프로젝트팀원 모집뿐이었다. 그나마 가장 긴 계약기간도 1년이 채 안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신규를 뽑는다고 하고는 관련 분야에서 3년 이상 실무를 쌓은 경력자만 찾았다. 어딘가에서 일을 배워야 지원이라도 해볼 수 있을 텐데, 갓 대학을 졸업하고 업무 경험이 전혀 없는 생초짜를 받아준다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꼬박 2년을 어디에도 발 붙이지 못하고 잠깐 여기서 일하고, 잠깐 저기서 일하는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주변 친구들은 취업도 잘 되어 편하게 살고 있는 거 같은데 내 앞날은 캄캄하기만 했다. 너는 가능성이 없다고, 널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을 거라며 세상이 온통 내게 손가락질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길을 걸을 때도 지하철에서도 내내 땅바닥만 보고 다녔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내 모습이 들킬 것 같아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핸드폰 속 전화번호부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그 누구에게도 연락할 수 없었다.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옆방의 소리가 가감 없이 들려오는 자그마한 고시원의 내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죽여가며 몇 시간이고 울었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때의 내게 유일한 숨 쉴 구멍이 되어 주었던 건 음악이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공 CD에 녹음해서 만든 셀프 컴필레이션 앨범 몇 개를 돌려가며 듣고 또 들었다. 막막할 때, 울고 싶을 때, 외로울 때마다, 이어폰을 끼고 CD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눈을 감고 내가 고시원 방이 아니라 어딘가 깊은 바닷속에 있다고 상상하곤 했다.


   또 하나의 숨 쉴 구멍은 하늘이었다. 땅만 쳐다보고 다니다가 어느 날 올려다본 하늘은 눈물이 나도록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숨이 막혀 있어서 제대로 숨 쉬는 법도 잘 몰랐지만, 가끔가다 하늘을 보면 여유롭게 떠다니는 구름과 푸른 하늘에 왠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음악을 듣고 하늘을 보며 내게 기회조차 주지 않는 차갑고 냉정한 사회에서 벗어나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시기를 지나고 나서도 힘들고 아플 때마다 내가 찾는 건 1번이 음악, 2번이 하늘과 바다 앞에서 쉬는 거였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정리하고, 하늘과 그 하늘에 맞닿은 바다와 숲을 거닐며 쉼을 얻었다. 사람이 끔찍하게 싫었던 시기에도,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도 그랬다. 음악과 하늘은 항상 내게 가장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몇 년 전부터는 나의 숨 쉴 구멍이 두 개 더 늘었다. 바로 부부가 된 지 8년째인 내 남편과 다음 달이면 아홉 살이 되는 강아지 봉봉이다. 불편한 상황이 생겨 투덜대는 나의 편을 무조건 들어주는 남편 덕분에 힘이 난다. 또 내가 지칠 때마다 누나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위로해 주는 우리 강아지. 매일 내게 쪽 하고 뽀뽀를 해 주기도 하고 눈물을 핥아주기도 한다. 봉봉이는 가끔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내 기분을 기막히게 잘 아는 것 같다.


   때로 그 힘들었던 시간을 지나 지금 여기에 무사히 도착해 있는 것이 믿기지 않게 감사하다. 여전히 사는 게 쉽지만은 않고 팍팍할 때도 있지만 여기저기 숨 쉴 구멍들이 있어 요즘은 꽤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남은 날들도 쭉 행복을 놓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매일 감사하며 나의 숨 쉴 구멍들과 함께 기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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