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곳에서 적응도 하고 업무도 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모두가 각자의 업무에 분주한 중에도 조금씩 새로운 만남이 생겨나고, 함께 한 해를 보낼 동료들과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낯설기도 즐겁기도 하다.
사실 이곳에 오자마자 먼저 계셨던 분들에게 윗분이 어떤 분이신지 얼핏 듣기는 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분이라는 이야기와 정년이 얼마 남지 않으셨으니 조금만 참으라는 충고 아닌 충고는 내게 미세한 불안감을 가져다주었다.
업무를 진행할 때 어느 정도의 레벨로 맞추어야 하는지 난감해서 부장님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는데, 사전에 합의가 되면 예상보다는 어렵지 않다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답을 해주셨다. 아이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고민하던 중이라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여러분은 사람이 언제 가장 가치 있고 빛나는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조금 뻔한 답변일지도 모르지만 나와 다른 사람을 모든 것을 떠나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이 사람을 가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근무를 시작한 지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 자꾸만 귀를 간지럽힌다.
가장 충격적인 일은 최근에 일어났다. 당연히 있어야 할 구성원들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아 궁금했는데, 어떻게 보면 가장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구성원들을 불필요한 갑질로 괴롭히더니 결국 재계약을 하지 않고 무단으로 해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아직 일하고 계신 다른 분에게도 비슷한 갑질을 하는 걸 두 눈으로 보니 피가 끓어오르고 너무 화가 났다.
몇 년 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그때 힘들어하는 당직 기사님과 청소 여사님께 부당해고를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을 따로 알려드렸었다. 다행히 잘 해결이 되어 꾸준히 일해오셨고, 얼마 전에는 병원에서 우연히 만나 오랜만에 반가운 안부를 묻기도 했었다. 근데 이곳에서는 오자마자 이런 일이 생겨서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 난감했는데, 다른 루트로 방법을 전해 들으신 것 같기는 하다.
한국 사회는 바야흐로 저출생에 고령화사회로 접어들었다. 점점 연령대는 높아지는데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노인을 폄하하는 말이 유행하기도 한다. 청년들이 노년의 세대를 우스꽝스럽게 보는 것이 과연 청년들만의 문제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깝게 매일 지하철에서 만나는 무례한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과, 개인의 사정도 잘 알지 못하면서 지나친 훈수를 두거나 막말을 쏟아내는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은 나이에 관계없이 먼저 인간이 되라는 일갈을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적어도 한 기관을 책임지는 어른이라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 아닐까. 없는 문제를 만들어 자꾸 꼬투리를 잡아 내보낼 생각을 하는 건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 인간인지를 티 내는 것 같기도 하다. 자기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존중하는 법을 알아야 진짜 어른이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유연해지고 넓어지리라고 믿었는데, 오히려 좁쌀만 해지고 더욱 치사해지는 것이 참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사회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답답함이 커진다.
몇 년 전, TV 뮤지컬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그 눈을 떠’라는 제목의 뮤지컬 곡을 들었다. 가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온몸이 전율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뮤지컬 웃는 남자’가 다시 올라왔을 때, 기대하며 공연을 보러 갔다. 반쯤은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는데 보는 내내 감탄하고 감동했던 것은 물론 시간을 내서 공연을 반복해서 보며 나의 삶의 태도를 점검하기도 했었다. 이 노래를 우리 기관의 가장 높은 어른께 꼭!! 들려 드리고 싶다.
“경들, 부족함 없이 다 갖춘 분들. 경들, 나 여기 진실을 외칩니다.
간청드리고 연민에 호소하오. 늦기 전에 세상을 돌아봐
경들, 돈 많고 많이 배우신 분들. 봐요, 하늘의 벌이 두렵지 않나
슬픔으로 가득 찬 거리 풍경. 굶주리는 또 다른 세상을
그 눈을 떠 지옥 같은 저 밑바닥 인생들
그들이 견뎌야 할 또 치러야 할 참혹한 대가
그 눈을 떠 맘을 열고 증오와 절망 속에
희망까지 죽어가 눈을 떠 봐
전 최고로 높은 귀족이 됐죠. 이 흉터는 사라지지 않지만
다 그렇지 완벽할 순 없어요. 사람이란, 여러분조차도
그 눈을 떠 지금이야 가진 것을 나눠 봐
자비를 베풀어줘 더 늦으면 안 돼!
그 눈을 떠 맘을 열어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을 때까지 제발 눈을 떠 봐
눈 속에서 길을 잃고 뼛속까지 얼어붙어
굶어 죽길 기다려 본 적 있는가
빵 한 조각 석탄 조각 구걸하며 우는 기분
모를 거야 그 눈을 뜨기 전엔
죽어가는 사람들 아픈 상처들을 외면했죠.
그 눈을 떠 지옥 같은 가난과 고난 속에
저 벽을 무너뜨려 참된 자유만 오직 정의만
살아 숨 쉬게 거짓을 꿰뚫어 봐
이제는 그 눈을 떠 봐.”
_뮤지컬 웃는 남자 ‘그웬플린’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