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물은 단 하나다. 휴대폰과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오전의 테마와 오후의 테마는 각각 다르다. 느낌따라 풍경따라 마음 가는대로 선곡이 바뀐다. 오늘 아침은 강렬한 락발라드다.
김경호가 깔끔한 고음을 내지른다. 뒤이어 최재훈의 목소리가 들린다. 도원경의 시원한 목소리가 좋다. 이어폰 안에선 음악의 세대를 넘나들고, 발걸음은 바닷길과 숲길을 오르락내리락 한다.
주위의 풍경에 몰입하고 싶을 때는 잠시 볼륨을 줄인다. 집중해서 귀를 기울여 보면 파르르 꽃잎이 바람에 떨리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 하다.
사진으로 담고 싶은 풍경이 나올 때면 멈추어 서서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셔터를 누른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풍경을 찍어도 미묘하게 다르다. 때로는 다 다른 곳에서 찍었는데 하나로 이어진 길처럼 보인다. 바다와 맞닿은 길이 주로 이어져서 그런 것 같다.
음악과 경치감상과 사진예술의 조화를 추구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점심 무렵이다. 올레길을 걸을 때는 배가 미친듯이 고플 때까지 식사를 하지 않는다. 중간에 화장실을 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배고픔이 더 이상 참기 힘든 정도가 되면, 근처에 가서 식사를 하고 차도 마시고 화장실도 들른다. 한참 쉬다가 모든 볼일을 해결하고 다시 출발해야 안심이 된다.
든든히 아침을 먹고 출발해서 오후 2~3시까지 걷고, 그 후에야 겨우 점심을 먹는다. 겨울의 제주는 해가 일찍 떨어지고, 올레길 바다코스는 밀물로 위험해서 저녁 6시부터는 출입을 통제한다.
아침 9시부터 걷기 시작해도 저녁 6시까지는 고작 9시간 뿐이다. 중간에 식사하고 쉬는 시간을 빼면 6~7시간도 채 걸을 수가 없어 더 서두르게 된다. 올레길 코스는 보통 5~6시간 거리인데 보폭이 좁은 내 걸음으로는 1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어야 넉넉하게 걸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4뱍 5일 동안 매일 올레길을 걸은 적이 있다. 올레길 기점이자 종점인 올레 간세를 중심으로 하여, 파랑색 올레길 표지를 따라 정방향으로. 주황색 올레길 표지를 따라 역방향으로 걷다보면 제주의 언덕도, 오름도, 바다도, 돌담도, 마을도 모두 만날 수 있다.
혼자 걷는 길에서 나를 비워낸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서 벗어나 더 편안한 길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바람을 따라 빙글빙글 돌아도, 노래를 따라 불러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 않는다. 이제까지의 나를 비우고, 새로운 나를 채워넣는 시간이다.
혼자 걸었던 수많은 제주의 길들을 기억한다. 길 하나하나마다 크진 않아도 소소한 추억들이 담겨있다. 뚜벅이로 시작한 여행이라,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운전을 시작한 후 렌트카로 다녀보니 혼자 걸어다니던 시간들이 몹시 그리웠다. 너무 늦기 전에 제주 한 바퀴를 걸어서 완주할 날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