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퉁이 뜨개방, 마음을 짜는 사람들
"아오, 안 되겠다. 도대체 이 시간만 되면 왜 이렇게 졸린 거야?"
오후 2시, 식사 후의 나른함이 둥둥 떠다니는 사무실 안, 수현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에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는 탓에 이제는 건강을 위해 카페인을 조금 줄여보려고 했지만, 매번 이 시간이 되면 그 다짐은 수포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식곤증이란 건 사람의 의지만으로 이겨내기 참 어려운 존재다. 어쩔 땐 고객사에서 걸려온 클레임 전화나, 부장님의 긴급 호출로 잠이 확 깰 때도 있지만 그게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생각지도 못한 일로 수현의 머리에서 잠이 확 달아나고 말았다. 커피를 타기 위해 탕비실 앞에 도착한 순간, 닫혀 있는 문 안에서 구매팀의 이대리와 김주임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아니, 강대리가 정말로 이혼했다고? 에이, 설마~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혼해? 그 남편이랑 연애도 엄청 오래 했다며. 김주임이 뭐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별로 친하지도 않은 이대리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수현은 그대로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열었을 탕비실 문 앞에서 졸지에 대화를 엿듣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아니라니까요? 제가 아까 점심 먹을 때 옆 테이블에서 강대리님이 소정 씨랑 얘기하는 거 들었어요. 소정 씨가 자기 아는 오빠를 막 소개해 준다고 하는데, 강대리님이 '어유, 내가 무슨 남자를 만나? 나 이제 남자라면 지긋지긋한 거 알잖아. 난 그냥 평생 이대로 혼자 살 거야.'라고 했다니까요? 이게 이혼했다는 말 아니면 뭐예요?"
"말도 안 돼. 그럼 진짜로 이혼한 게 맞다는 거야? 어휴, 진짜 어이없네. 아니, 이렇게 금방 이혼할 줄 알았으면 내가 그때 강대리 결혼식 때 축의금 안 냈지~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그래도 옆 팀이라 예의상 냈건만, 괜히 내 돈만 아깝게 됐잖아? 그나저나 이혼했으면 우리가 낸 축의금 환불받아야 되는 거 아니야? 잘 살라고 축의금 낸 건데, 잘 살지도 못하고 이혼했으니까 다시 돌려줘야지! 우리 성의를 완전히 무시한 거잖아!"
"그러게요. 우리 회사 사람들만 해도 각자 5만 원, 10만 원씩 냈을 텐데, 그거 다 모이면 얼마예요? 어휴, 저도 이참에 그냥 친한 남사친이랑 결혼한다고 뻥치고 축의금이나 쓸어 모을까 봐요. 그래놓고 1년 있다가 이혼한다고 하면 완전 한몫 제대로 땡기는 거잖아요~"
"뭐야, 김주임 비혼주의라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사친이랑 결혼한다고 뻥치는 건 좀 오바 아냐? 하여튼 김주임도 참 웃기다니까! 푸하핫!"
남의 불행이 얼마나 즐거우면 그렇게 깔깔대고 웃는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탕비실 문을 열고 들어가 둘의 머리 끄덩이라도 잡고 싶었다. 순간 치밀어 오른 화 때문에 머리가 아득해지고, 피가 철철 끓는 듯 온몸이 뜨거워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문 손잡이를 잡은 손은 차갑게 식은 채 덜덜 떨리고, 두 발은 강력접착제로 땅바닥에 붙인 듯 움직이질 않았다. 결국 수현은 작게 한숨을 내쉰 채 자리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남이사 이혼을 하든 말든, 지들 인생이나 잘 살 것이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속으로 욕을 한 사발 내뱉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소정이 고개를 돌려 말을 걸어왔다.
"대리님, 커피 타러 가신다면서 왜 빈손으로 오세요? 탕비실에 커피 다 떨어졌어요?"
순진한 얼굴로 묻는 소정에게 잠이 깨서 커피를 안 마셔도 된다며 대충 둘러대고선 두 눈을 모니터에 고정했다. 하지만 방금 전 탕비실 앞에서 들었던 대화 때문에 일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수현은 직장 동료들이 자신의 뒷담화를 하는 걸 듣고도 가만히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괜히 그들에게 따지고 들며 일을 키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수현이 9년 간의 긴 연애 끝에 결혼했던 그 남자와 겨우 1년 만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옆자리의 소정 말고는 회사에서 아무도 몰랐던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이 방금 두 명 늘어나긴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수현은 "나 이혼녀요!"하고 당당히 떠들고 다닐 만큼 쿨한 성격도 못 되었다. 적당히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어 하는 무던한 사람, 그게 바로 수현이었다. 굳이 이혼 사실을 회사에 밝혀 주목받고 싶지도, 쏟아지는 질문과 잔소리, 수군거림을 감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수현이 할 수 있는 건, 퇴근 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하소연을 하는 것뿐이었다.
"뭐? 축의금 환불? 참나, 뭐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인간들이 다 있어? 누가 축의금 내라고 협박했나? 지들이 사회생활 한다고 낸 거면서 이혼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어휴, 수현아. 앞으로 그 인간들하고는 상종도 하지 마. 솔직히 요새는 이혼이 흠도 아닌데 네가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고 주눅 들 필요 없잖아, 안 그래?"
이혼은 흠이 아니라는 친구의 말에 수현은 갑자기 가슴에 뭐가 턱 걸린 듯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전남편과의 이혼을 결정한 후에, 그리고 이혼 절차가 마무리된 후에 수도 없이 들었던 그 말. 수현은 그 말이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이혼은 흠이 아닌 걸까? 그런데 왜 나는 이혼했다는 이유로 뒷담화를 듣고, 이렇게 죄인처럼 이혼 사실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거지? 그리고 왜 우리 가족은 내가 이혼한 사실을 쉬쉬하고, 친구들은 왜 나를 안쓰러운 눈길로 보는 거지? 이래도 정말 이혼이 흠이 아니라고?
수현은 그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직접 이혼을 해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되묻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악의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냥 속으로 분을 삭일뿐이었다. 그래서 오늘 친구가 했던 위로의 말 역시도 늘 듣던 잔소리로만 들릴 뿐, 수현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지는 못했다.
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울적한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남들은 결혼해서 다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 모양일까? 때마침 저 앞에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커플이 보이자 괜스레 화가 나서 애꿎은 땅만 발로 쿵쿵 구르듯이 찼다. 그들의 뒷모습만 봐도 알콩달콩 웃음이 가득한 게 여기까지 느껴져서 더 열불이 났다. 안 그래도 안 좋았던 기분이 바닥을 뚫고 맨틀까지 처박힐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나도 그땐 좋았단 말이야. 평생 행복할 줄 알았는데, 나도, 나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면서 걷다 보니 집에 가는 길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지하철 역에서부터 한참을 걸어 이혼 후 혼자 살고 있는 오피스텔 건물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때,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던 누군가가 "어머, 지금 퇴근하시나 봐요." 하고 가볍게 말을 걸어왔다. 오며 가며 자주 마주치던 옆집 아기엄마였다. 수현은 친구 만나고 오느라 늦었다고 짧게 대답하고선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려 시선을 피했다. 눈가에 고여있는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기엄마는 눈치도 없는지 해맑은 목소리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난 우리 애들 때문에 친구들 한번 만나기도 엄청 힘든데, 아가씨라 자유롭게 다니는 거 너무 부럽다~ 그나저나 내가 동생 같아서 하는 말인데, 지금 즐길 수 있을 때 많이 즐겨 둬요. 결혼해서 애 낳고 나면 이런 시간들이 얼마나 그리워지는지 모르죠? 친구들 만나서 맥주 한잔 하면 스트레스가 확~ 풀릴 것 같은데, 맥주는커녕 오늘같이 회사에서 야근하는 날이면 집에서 애들 봐주시는 우리 시어머니 눈치 보여서 못 산다니까요?"
"아, 네... 그러시구나... 일하면서 애들이랑 시어머니까지 신경 써야 돼서 힘드시겠어요..."
평소 같으면 옆집 아기엄마의 수다를 기꺼이 받아줬을 테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엘리베이터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늦게 내려오는지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요. 애들이 초등학교라도 들어가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 애들이 어려서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지 몰라요. 게다가 어머님한테 애들 봐주시는 비용도 다달이 드려야 하는데 그게 뭐 한두 푼이겠어요? 그렇다고 무턱대고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고... 이래서 워킹맘은 참 여러모로..."
적당히 "네, 네." 하고 성의 없는 리액션을 하면서 엘리베이터 옆 게시판을 둘러보았다. 대화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면 더 말이 길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시판에는 반려동물 관련 주의사항과 금연 안내문 등이 붙어 있었다. 매번 보던 것들이라 무심하게 훑고 지나가는데, 순간 처음 보는 전단지가 하나 붙어있는 게 보였다. 하얀 A4용지에 까만 글자밖에 없는 단출한 전단지였지만, 왠지 모르게 그 내용에 관심이 갔다.
평소에 취미라고는 유튜브를 보거나 간간히 책을 읽는 것밖엔 없었고, 뜨개질 같은 건 해볼 생각 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힐링'이라는 두 글자를 보자 갑자기 가슴이 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도 많이 보던 흔한 단어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그 느낌이 새롭게 다가왔다.
'힐... 링...?'
전남편과의 불화로 쌓였던 스트레스, 이혼 후의 무기력함, 그리고 주변 사람들로 인해 바닥을 치는 자존감까지. 수현은 어쩌면 지금 자신에게 제일 필요한 게 바로 '힐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쩜 이렇게 나한테 딱 맞는 단어가 눈앞에 나타날 수가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긴가민가 하기도 했다. 뜨개질을 하면 마음이 힐링된다고? 정말 나도 뜨개질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걸까? 그까짓 결혼 생활도 못 참아서 1년 만에 도망친... 나 같은 실패자도...?
"그래도 집에 들어가서 우리 애들 웃는 것만 보면 어찌나 행복한지, 내가 이렇게 예쁜 애들을 낳았다는 게 참 축복인 것 같아요. 이래서 역시 사람은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야..."
옆집 아기엄마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지만 수현은 이제 더 이상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애를 어떻게 키우든 말든, 지금 수현한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저기요, 엘리베이터 왔는데 먼저 올라가세요. 저는 잠깐 편의점 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집에 샴푸가 다 떨어졌는데 사 오는 걸 깜빡해서요."
"아, 그래요? 어유, 씻어야 되는데 샴푸가 없으면 곤란하죠. 그런데 지금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혼자 편의점까지 가기 무섭지 않아요? 내가 우리 집에 있는 샴푸 조금 덜어줄까요?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금방 오니까 그때까지만 우리 집 거 덜어서 쓰고 그다음에 택배 오면..."
"아뇨,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두피가 예민한 편이라 아무거나 못 써서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얼른 올라가 보셔요."
"어유, 그럼 먼저 올라갈게요. 어두운데 조심히 갔다 와요~"
아기엄마의 목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수현은 다시 아까 봤던 전단지에 눈을 돌렸다. 모퉁이 뜨개방이라. 전단지에 적혀 있는 주소를 보니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수현은 전단지에 적혀 있는 연락처를 휴대폰에 저장한 후에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아까 두 눈 가득 고여있던 눈물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