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나에게 주는 선물

[소설] 모퉁이 뜨개방, 마음을 짜는 사람들

by 김펄미

"대리님, 저 오늘 퇴근길에 요 앞에 새로 생긴 케이크 가게 구경 좀 하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가보고 맛있어 보이는 거 있으면 하나 사서 같이 먹어요!"


"뭐? 웬 케이크 가게?"


"대리님 요새 스트레스 많이 받으시는 것 같길래요. 원래 그럴 땐 달달한 걸 먹어줘야 되잖아요~!"


수현은 소정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밝을 수가 있을까? 소정의 저런 천진난만함과 친근한 성격이 바로 수현이 소정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여태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었다. 일은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상사의 비위만 열심히 맞추는 간신배들도 여럿 봤었고, 직장 동료끼리 편 가르기를 하며 이간질을 시키는 못된 인간들도 많이 봤다. 게다가 고함만 지를 줄 아는 무능력한 상사에, 배울 생각은 없고 툭하면 울음을 터뜨리거나 그만둬버리는 신입 직원들까지. 직장이란 곳은 그야말로 만나기 싫은 인간들을 모아놓은 집합소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소정만큼은 달랐다. 수현이 일하는 해외영업팀의 막내로 들어온 그녀는 매사에 열심이었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씩씩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상사인 수현에게도 예의를 잃지 않으면서 친근하게 다가오니 예뻐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혼 사실을 회사에 밝히길 꺼렸던 수현도 소정에게만큼은 솔직하게 털어놨던 것이었다. 이제 소정은 단순한 직장 후배가 아니라,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한 동생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오늘도 소정을 따라 케이크 가게에 가고 싶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선약이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소정 씨, 미안한데 어떡하지? 나 오늘은 퇴근하고 바로 어딜 가봐야 해서. 우리 케이크 가게는 내일 가자. 대신 내가 내일 케이크랑 커피 쏠게!"


몇 시간 후, 시계가 6시 정각을 가리키자마자 수현은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퇴를 너무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사무실에서 제일 먼저 나가는 게 너무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하철 역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고,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지하철 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해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새로운 걸 시작한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오늘은 며칠 전 전단지에서 봤던 뜨개방에 처음으로 뜨개질을 배우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 전단지를 처음 봤을 때의 그 운명 같은 느낌은 하루, 아니 반나절만에 사라지긴 했다. 그냥 단순한 광고성 멘트였을 뿐인데, 그날은 아마 기분이 너무 우울했던 나머지 그런 사소한 것에라도 위로를 받고 싶어서 그랬을 거다. 하지만 정말 신기한 건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는 것만으로도 우울감이 사라지고 조금이나마 행복해졌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친 마음을 뜨개질로 힐링해 보세요."라는 그 전단지 속 문구가 꽤 설득력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수현의 기분을 리프레쉬하는 효과는 있었으니까.


지하철 역에서 내려 주택가 쪽 골목으로 10분 정도 걸어 들어가자 4층짜리 건물의 1층 모퉁이에 오늘의 목적지가 있었다. 통유리창을 흰 커튼으로 가려 놓긴 했지만, 저녁이라 그런지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으로 인해 내부가 살짝 보였다. 가운데에는 기다란 테이블이 하나 있는 것 같았고, 그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의 실루엣도 비쳤다. 인형이나 화분같이 생긴 것들도 언뜻 보이는 게 나름 공들여 꾸며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수 만든 것 같은 문패가 달려있는 유리문을 살짝 잡아당겨 열자, 머리 위에서 딸랑딸랑- 하고 종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수현의 또래로 보이는 젊은 여자 선생님이 달려 나와 살가운 표정을 지으며 반겨주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참 상냥한 얼굴이었다.


"어서 오세요, 모퉁이 뜨개방입니다!"


"안녕하세요, 저 오늘부터 뜨개질 배우기로 한 강수현이라고 하는데요."


"어머, 시간 딱 맞춰서 오셨네요? 어유, 퇴근하고 바로 오시느라 고생하셨겠다. 우선 이쪽에 앉으시고요, 혹시 커피랑 차 중에 어떤 걸 더 좋아하세요?"


"아, 저는 그냥 따뜻한 물 주세요. 요즘에 카페인을 줄이고 있는 중이라서요."


그렇게 말하며 선생님이 가리킨 흰색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첫 수업이라 뭔가 미리 준비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 전 문자로 상담을 했을 때 맞춤식으로 가르쳐준다고 듣긴 했는데, 빈 테이블 앞에 있으니 도대체 뭘 어떻게 배우는 건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질문을 먼저 해야 되나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선생님이 수현에게 따뜻한 물을 건네며 말을 걸길래 질문하려던 걸 속으로 취소했다.


"아참, 제가 제 소개를 안 했죠? 저는 앞으로 수현 님한테 뜨개질을 가르쳐드릴 리나라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리나 쌤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나저나 며칠 전에 문자로만 잠깐 대화하다가 이렇게 직접 수현 님을 만나게 되니까 너무 반갑네요."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앞으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뭐가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티코스터, 가방, 담요 등 할 수 있는 것들이 다양했지만 수현은 도통 고르기가 힘들었다. 뜨개방에 오기 전까지는 마음이 설레었었는데, 막상 진짜로 배우려니까 자신감이 뚝 떨어져 버린 것이다.


"선생님, 저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 제가 잘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엉성한 실력으로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한테 선물하기도 좀 그럴 것 같아서요. 사실 저... 뜨개질의 뜨자도 모르거든요."


"에이, 뜨개질의 뜨자도 모르는 게 어때서요? 앞으로 저한테 배우면서 알아가면 되는 거죠. 그리고 뜨개질해서 꼭 다른 사람한테 선물하란 법 있나요? 내가 고생해서 뜬 건데, 나 자신을 위한 선물로 쓰면 되죠!"


"저를 위한 선물이요...?"


수현은 자기 자신한테 마지막으로 선물을 줬던 게 언제였는지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다가 금방 그만뒀다. 딱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수현에게 선물이란 건 다른 사람에게 주는 선물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다시는 선물을 주고받을 일이 없는 그 나쁜 놈까지. 그놈이랑 결혼을 하기 전, 9년 동안 연애를 하면서 주고받았던 선물을 모아보면 아마 방 하나가 가득 차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때는 선물 하나를 고를 때에도, 선물과 함께 줄 편지를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쓸 때에도, 그 사람이 그걸 받고 얼마나 좋아할지 상상하며 정말 행복했었다. 그를 위해 쓰는 돈이 아깝지 않았고, 그와 함께하던 시간들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어차피 그렇게 오갔던 마음들이 한순간에 쓸모없어져 버린 걸. 결국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럼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수현은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생각들 때문에 갑자기 속이 더부룩해져서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말았다.


"네, 때로는 나 자신을 위한 선물도 필요한 법이잖아요!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인데, 나를 내가 안 챙기면 누가 챙겨요? 호호호! 그러니까 그냥 첫 작품은 수현 님 자신을 위해 주는 선물이다, 생각하고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아시겠죠? 제가 장담하는데, 수현 님은 잘하실 수 있어요. 진짜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리나의 목소리는 세상의 풍파를 한 번도 안 겪어본 사람 같이 천진하기도 했고, 또 어떻게 들으면 쿨하고 어른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아직 리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뭐가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녀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수현에게도 옮겨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냥 듣기 좋은 말을 몇 마디 들었을 뿐인 건데, 이상하게도 자신감이 붙고 당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내가 이걸 만들어서 어디다가 팔 것도 아닌데, 좀 엉성하면 어때? 그냥 나 혼자만 만족하면 되는 거지. 어차피 요즘에 맨날 우울했는데, 기분전환도 할 겸 나 자신한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지 뭐.'


"수현 님, 뭐 뜰지 고르기 어려우시면 제가 하나 추천해 드릴까요? 사실 아까 수현 님이 여기에 들어오셨을 때, 조금 추워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이왕이면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걸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거요? 설마 옷 같은 거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그건 너무 어려울 것 같은데..."


"옷은 아직 이른 것 같고요, 음... 뭐가 좋으려나. 아, 목도리가 딱 좋겠다! 만들기도 쉽고 실용적이기도 하거든요. 수현 님, 목도리 어떠세요? 한번 도전해 보실래요?"


전남편 생각에 잠깐 울적한 기분이 들었던 수현은 다시 표정을 풀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힐링하러 여기까지 왔는데 쓸데없이 우울해하면 안 되지. 그럼, 그렇고 말고. 내가 이제 와서 그딴 놈을 왜 신경 써?


"네, 좋아요. 저 그럼 목도리 뜨는 법 알려주세요. 저 그거 만들어서 남들한테 절대 안 빌려주고 저 혼자 겨울 내내 두르고 다닐 거예요."


그래, 이건 내 선물이다. 내가 나한테 처음으로 주는 소중한 선물. 수현은 그동안 고생했던 마음에 대한 보상을 직접 만든 목도리로 받겠다고 다짐하며 리나와 함께 실을 골랐다. 수현이 고른 실은 두께가 우동면보다 약간 얇은 보들보들한 털실이었다. 실 색깔은 누가 봐도 겨자색이었지만, 수현은 프리지아를 닮은 밝은 노란색이라고 우기고 싶었다. 수현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 바로 프리지아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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