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퉁이 뜨개방, 마음을 짜는 사람들
그 후 수현은 지난 일주일간 그랬던 것처럼 퇴근 후에 꾸준하게 뜨개질을 했다. 비록 예전처럼 가방에서 수시로 꺼내보며 뿌듯해하지도, 소정에게 자랑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완성은 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지낸 지 3일째 되는 날, 퇴근길 지하철역에서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나고 말았다. 중간에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열심히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수현의 어깨를 툭 하고 치는 것이다. 불쾌한 기분에 속으로 짜증을 내며 돌아본 수현은, 익숙한 얼굴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 대욱 오빠...?"
"야, 너 수현이 맞지? 아니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야."
수현에게 아는 척을 한 사람은 바로 대학 선배 김대욱.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연락한 적이 거의 없지만, 대학을 다니던 당시에는 나름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그때 당시에는 선후배끼리 같이 전공수업도 듣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그랬으니까. 그래서 수현도 반가운 마음에 대욱과 나란히 걸으며 안부를 물었다.
"우와, 오빠 진짜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이렇게 정장 입고 있는 거 보니까 완전 딴사람 같은데요?"
"아, 그래? 고마워. 그런데 너야말로 예전에는 되게 푼수 같더니, 이제는 엄청 차분하고 어른스러워 보이네?"
"에이, 저도 이제 30대인데 언제까지 푼수 같을 순 없죠. 그런데 오빠도 1호선 타고 출퇴근하나 봐요? 어떻게 이런 데서 다 마주치지?"
"그러게. 아무래도 세상이 좁긴 좁은가 보다. 그나저나 너도 잘 지내지? 형준이는? 내가 형준이랑도 연락 안 한지가 꽤 돼서. 둘이 아직 좋은 소식은 없는 거야?"
"... 네...?"
수현은 대욱의 입에서 나온 '형준'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목이 턱 막히고 말았다. 다시는 들을 일 없을 것 같던 그 이름 정형준. 그건 바로 수현의 전남편이었기 때문이다.
"너네 학교 다닐 때도 진짜 유명한 커플이었잖아~ 세상에 대학생 때 CC였던 애들이 결혼까지 할 줄 누가 알았겠냐? 내가 그때 해외출장만 아니었으면 너네 결혼식에 가서 완전 축하해 주는 거였는데. 그러고 보면 너네도 진짜 대단하다. 네가 형준이랑 사귀기 시작한 게 대학교 2학년 땐가 그랬었지? 이야, 그때부터 지금까지 인연이 도대체 몇 년이야? 벌써 11년이잖아, 11년!"
대욱이 말을 하면 할수록 수현의 얼굴은 점점 흙빛이 되어갔다. 반가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난감함으로 변해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대욱과는 겹치는 지인이 많아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터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기로 했다.
"오빠, 저 이혼했어요. 이제 그 사람이랑 같이 안 살아요."
순간 대욱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뭐? 이혼했다고...? 아니, 언제...?"
"올해 초에요. 저랑 제일 친한 친구들 몇 명 빼고는 아직 아무도 몰라요."
수현은 애써 괜찮은 척하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으니까 굳이 동정 같은 건 안 보내도 된다고.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대욱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걱정도, 동정도 아니었다.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참견과 오지랖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 도대체 왜 이혼했는데? 설마 형준이가 바람피웠어? 너 몰래 다른 여자 만나고 다닌 거야?"
수현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자 대욱은 또 다른 질문을 연속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럼? 형준이가 널 때렸어? 아니면 도박이라도 한 거야? 뭐? 아니라고? 하긴, 내가 아는 형준이는 그럴 애가 아닌데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지. 그럼 도대체 왜 이혼한 건데? 혹시 시집살이라도 심하게 당한 거야? 그것도 아니면, 설마 네가 잘못해서 이혼한 거야? 그건 아니지?"
계속해서 고개를 가로젓던 수현은 조용히 한 마디 내뱉었다. 그냥 성격 차이 때문에 이혼했다고. 하지만 대욱은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더 흥분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뭐? 성격 차이? 야, 수현아. 세상에 성격이 100% 잘 맞는 부부가 어디 있냐? 나는 뭐 우리 와이프랑 성격 잘 맞는 줄 알아? 다들 성격 안 맞아도 그냥 참고 사는 거야~ 그리고 다른 부부도 아니고 너네는 그깟 성격 차이로 이혼하면 더 안 되지~ 너네가 여태까지 만난 시간이 얼마인데 겨우 성격 조금 안 맞는다고 이혼을 해?"
"글쎄요, 겨우 조금 안 맞는다고 표현하긴 좀 그렇네요."
"그럼 심하게 안 맞기라도 했다는 거야? 에이, 너네가 정말로 안 맞는 사이였으면 그동안 그렇게 오래 만날 수 있었겠어? 나도 대학 시절부터 너네 커플을 봐와서 알지만, 솔직히 너네만큼 잘 어울리고 잘 맞는 커플이 어디 있다고 그래. 너네 식성도 잘 맞아서 맨날 둘이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둘 다 책 읽는 거 좋아해서 도서관에서도 데이트하고 그랬잖아. 그리고 너네 둘이 대화하는 거 들어보면 무슨 콩트 하는 것처럼 티키타카가 얼마나 잘 됐었는데~"
그래, 그런 시절도 있었지. 수현은 입가에 맴도는 씁쓸한 기운을 애써 삼키며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듣기만 했다. 대욱에게 구구절절 자세한 상황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수현아, 내가 진짜 너네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둘이 자존심 싸움하지 말고 그냥 예전처럼 다시 잘 지내봐. 결혼이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렇게 성급하게 결정하면 안 되는 거잖아. 솔직히 너네처럼 성격 차이로 이혼할 거면 세상에 이혼 안 하는 부부가 몇이나 되겠냐? 내가 괜히 참견하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고, 너네같이 예쁜 커플이 이혼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 그래."
수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있었다. 다행히 수현과 대욱이 지하철을 갈아타는 방향이 서로 달라서 이야기가 더 길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욱이 시야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수현은 가슴 한편이 쿡쿡 찌르듯이 아팠다. 그가 했던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혼을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 거 아니냐는 그 말이 제일 큰 비수가 되었다. 사실 수현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으니까.
수현은 만약 과거로 돌아가 다른 결정을 하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 보았다. 만약에 그때 이혼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삶이 조금은 나아졌을까? 아니면, 오히려 더 지옥이 되었을까...? 하지만 직접 겪어보지 않은 미래는 알 수 없는 일, 수현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머릿속 생각을 떨쳐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번 떠올린 생각은 무정한 낚싯대가 되어, 수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묻어두고 싶었던 과거의 일까지 잔뜩 건져 올리고 말았다.
사실 대욱이 얘기했던 것처럼 수현에게도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좋은 시절이 있었다. 수현보다 한 학번 위였던 형준과 캠퍼스 커플이 된 이후, 수현은 늘 그가 운명의 짝이라고 믿어왔다. 키도 크지 않고 외모도 평범하지만, 수현을 위하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도 큰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성격도 얼마나 좋은지, 아마 '다정함'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만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고 상상했던 적도 많았다. 그래서 수현은 대학시절 내내, 그리고 졸업 후 직장에 들어간 후에도 늘 그와 함께했다. 기쁠 때나 슬플 때, 그리고 힘들 때도 늘 수현의 곁에 있어 주었던 건 항상 정형준, 그 사람이었다.
"수현아! 오늘 많이 늦게 끝났네? 저녁은 먹고 일한 거야? 혹시 안 먹었으면 내가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얼른 밥 먹으러 가자!"
"어? 뭐야! 오빠, 내가 언제 퇴근할지 모르니까 회사 앞에서 기다리지 말라고 했잖아~ 추운데 그냥 집에 가서 쉬지 뭐 하러 여기서 덜덜 떨면서 기다려? 어휴, 이 손 차가운 것 좀 봐. 이러다가 감기 걸리겠어!"
"감기는 무슨, 나 엄청 튼튼해서 감기 같은 건 안 걸리는 거 몰라? 그리고 네가 요즘에 회사에서 자꾸 혼나서 힘들어하는 거 뻔히 아는데 내가 어떻게 그냥 집에 가서 쉬어? 내가 남자친구로서 힘 날 수 있게 따뜻한 국밥도 좀 사주고, 든든하게 집에도 데려다주고 해야지, 안 그래?"
그는 같이 밥을 먹을 때에도 늘 수현의 수저와 물을 먼저 챙겨주고, 수현이 먹는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밥공기 뚜껑조차 뜨거울까 봐 대신 열어주고, 앞치마를 챙겨 오는 것도, 셀프 반찬을 떠 오는 것도 늘 그의 몫이었다.
"오빠, 내가 할 테니까 좀 앉아 있어. 오빠가 자꾸 이러니까 내가 오빠를 부려먹는 사람 같잖아."
"에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누가 그런 오해를 해? 그리고 내가 예전부터 말했지? 난 네 손에 물 절대 안 묻히게 할 거라고. 그러니까 수현이 넌 그냥 가만히 앉아서 먹기만 하면 돼. 난 네가 맛있게 먹는 것만 볼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한 것도 다 할 거니까!"
형준과의 연애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와 결혼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졌다. 그 말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결혼 얘기가 나오기 전부터 수현의 부모님에게 사위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아, 그리고 이건 등산복인데요, 지난번에 보니까 은근히 이런 푸른색 계열이 잘 어울리시는 것 같길래 제가 한번 사 와봤어요. 다음에 이거 입고 저랑 같이 등산 한 번 가요!"
"어이구, 그냥 와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무슨 이런 선물까지 다 준비했어? 그나저나 이거 사이즈가 딱 내 사이즈네? 내가 110 입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그거야 제가 눈썰미로 딱 알아봤죠~ 저보다 조금 어깨가 더 있으시니까 그 사이즈가 맞을 것 같더라고요."
"이야, 자네 보는 눈이 대단한데? 그나저나 이 옷 완전 내 마음에 쏙 드네! 당장 다음 주에라도 이거 입고 등산 한 번 가야겠어. 자네 그럼 정말로 나랑 같이 등산 갈 텐가? 가면 내가 파전에 막걸리 시원하게 한번 쏘지!"
"우와, 정말요? 아버님이 사주시는 막걸리면 당연히 먹어야죠~ 그럼 다음 주 주말에 제가 아침 일찍 여기로 오겠습니다! 토요일이랑 일요일 중에 언제가 괜찮으세요? 제가 무조건 아버님 일정에 맞추겠습니다!"
그의 살가운 성격은 부모님의 마음까지 쏙 뺏어가고 말았다. 그래서 수현이 그와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수현의 어머니는 신나서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고, 아버지는 집안에 경사가 났다며 친구들을 불러 한턱 쏘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본 수현 역시도 그와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수현은 9년 간의 연애에 마침표를 찍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둘은 분명 잘 살 거라며 덕담을 했고, 좋은 사람끼리 만나서 결혼한다며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수현은 그 사람들에게 증명이라도 하듯이 누구보다도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을 보냈다. 퇴근 후에는 서로 저녁밥을 차리겠다며 실랑이를 했고, 자기 전 침대에 누워서는 나중에 태어날 아기 이름을 지어보며 티격태격 대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의 아늑한 26평짜리 신혼집에는 늘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수현은 지금 이 생활이 꿈이 아니라 생시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 가끔씩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마 대한민국에 자신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도 가끔 할 정도였다.
하지만 역시 세상에 영원한 건 없는 걸까?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던 그들의 행복에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균열이 조금씩 생기다가 눈에 띄게 드러나기 시작한 건 그와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됐을 때였다. 영원히 불타오를 줄 알았던 그들의 사랑이, 생각지도 못하게 금방 식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