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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블 Jun 23. 2020

너에겐 우리가 있어

유년 시절의 이야기


"먹고살아야 하는 일을 우선으로 두어 작은 여유마저 사치라고 느껴질 때 ‘너에겐 우리가 있어.’라고 손 흔들어주는 풀잎과 나뭇잎을 만난다. 퇴근길 마음도 하늘만큼 어두워져 있을 때 가만히 올려다본 하늘의 별에서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 손으로 가리키던 별자리가 조용히 나를 비춘다."




퇴근 후 집을 도착하여 티브이를 켰다. 채널을 무심히 넘기다 좋아하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방영하기에 리모컨을 바닥으로 내렸다. 서울 생활로 지친 혜원(여주인공)이 고향인 시골 마을로 내려가 직접 농사도 짓고 수확한 농작물로 요리를 하며 서울 생활로 지친 자신을 돌보고 다시 기운을 내어 살아가는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한국 농촌의 사계절과 주인공이 직접 수확한 농작물로 요리하는 장면을 보며 영화를 보는 이 또한 자연과 가까이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그래서일까.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이 영화가 나오면 돋보기를 장착한 듯이 집중하게 된다. 한참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혜원의 엄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빠가 영영 떠난 뒤에도 엄마가 서울로 떠나지 않은 건 너를 이곳에 심고 뿌리내리게 하고 싶어서였어.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혜원의 엄마는 혜원이 서울로 가버린 뒤 홀연히 고향 집을 떠났다. 달랑 편지 한 통만 놓아두고서. 엄마의 편지에서 몇 조각의 기억이 내게서 떠올랐다. 나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자랐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오래된 집이었다. 대문 대각선 맞은편에는 나무문이 달린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고, 하늘색 대문을 열면 오른쪽으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생활하시던 마루가 있던 방이, 왼편에는 아궁이가 있는 아랫방이라고 부르던 방이 있었다. 아랫방 왼편 외양간에는 소, 닭, 오리를 길렀고, 마당 사이사이 개도 몇 마리 있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가면 펌프로 물을 길어 올리던 수도도 있었다.      


나와 동생은 어른들이 밭으로 나가시면 오리들을 한 줄로 세워 마당을 가로질러 개울가로 갔다. 오리는 자연스레 개울로 들어갔고, 우리는 개울가 옆에 쪼그려 앉아 오리에게 줄 먹이를 찾았다. 풀숲을 파헤쳐 고사리를 뜯고, 날렵한 손짓으로 메뚜기를 잡았다. 우리가 건네는 먹잇감을 오리는 부지런히 받아먹었다. 우리는 다음 놀이를 찾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 시절 시간은 우주만큼 많았고, 시골은 놀이동산보다 흥미로운 곳이었다. 자리를 옮긴 곳은 근처 도라지 밭이었다. 보라색과 하얀색 꽃이 한데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도라지 꽃망울은 손끝으로 포개 놓은 듯 앙증맞았다. 동그란 꽃망울을 한 손으로 잡아 풍선껌을 터뜨리듯 꽃망울을 터뜨리며 밭을 누볐다. 철없던 행동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여름은 덥고 길었지만 사실 여름만큼 즐거운 계절도 없었다. 감자, 참외, 복숭아, 수박, 옥수수까지 여름의 간식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았고, 햇볕이 따가워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도 우리의 놀이 또한 줄지 않았다.     


시골에서 지낸 어린 시절은 내게 깊게 스며있다. 기억은 예기치 않게 나를 찾아온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귓가로 들려온 소리, 스치듯 본 영화 한 장면에 잊고 지낸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이처럼 영화 속 대사이기도 하고, 산책하다 우연히 만난 메뚜기이기도 했으며, 낯선 여행지에서 들려온 개구리 소리이기도 했다. 분명 겪었던 일인데도 그 장면은 꿈처럼 흐릿하고 낯설다. 기억에만 존재하는 이야기는 얼마나 아득하기만 한가. 며칠 전 어린 시절 사진을 발견했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환히 웃으며 양손으로 수박을 쥔 나와 동생이었다. 불현듯 흐릿하고 낯설었던 시간이 손으로 잡힐 듯 가깝게 느껴졌다.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비록 내가 선택한 시골 생활은 아니었지만 시골에서 지낸 기억은 내게 많은 걸 건네준다. 먹고살아야 하는 일을 우선으로 두어 작은 여유마저 사치라고 느껴질 때 ‘너에겐 우리가 있어.’라고 손 흔들어주는 풀잎과 나뭇잎을 만난다. 퇴근길 마음도 하늘만큼 어두워져 있을 때 가만히 올려다본 하늘의 별에서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 손으로 가리키던 별자리가 조용히 나를 비춘다. 많은 것이 사라지고 또한 변해가더라도 내가 살아있는 한 내가 겪고 느낀 시절은 계속해서 나와 흐를 것이다. 그것은 언제든 다시 툴툴 털고 일어날 힘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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