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어쩌면 가족이란 서로의 가여움을 눈치채며 살아가는 사이일지도 모른다." 이수희 작가 <동생이 생기는 기분>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문장으로 지금은 데면데면해진 아빠가 떠올랐다. 핸드폰이라는 소통 수단이 있음에도 각자의 핸드폰에서 서로의 이름을 찾기 힘든 부녀 사이. 아빠와 내가 처음부터 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예닐곱 살 때부터 아빠의 퇴근을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아이였다. 집 안으로 들어오는 아빠 품에 폴짝 안기며 온몸으로 반가워했고, 휴일엔 둘만의 시간을 가지며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당신의 손가락 끝에서 나는 담배 냄새까지도 아빠 냄새라며 좋아했다.
아빠는 다재다능하셨다. 관광버스 기사를 하시던 아빠는 가족 휴가로 찾는 장소마다 당신의 역사 지식을 아낌없이 풀어주셨고, 기타를 손에 쥐면 악보를 보지 않고 즉석에서 노래를 불러주셨다. 또 붓글씨를 쓰는 아빠는 세상 누구보다 멋져 보였다. 당신은 나의 어릴 적 이상형이었다.
그런 아빠와 사이가 멀어진 건 고등학교쯤부터였다. IMF 이후로 당신의 사업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집안 가구마다 사정없이 빨간딱지가 붙었다. 부모님의 싸움은 지긋지긋하게 이어졌고, 매일 밤 이불속에서 흐느껴 울던 고등학생은 두 분을 향한 원망을 쌓아가며 하루를 보냈다. 무너지는 집안을 돌보지 않는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우리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고, 나는 야간대학을 다니며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가족은 점점 대화가 없어졌고, 함께하던 외식도 사라져 갔다.
우리 가족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섬 같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섬은 분열되어 각자 멀리멀리 흩어져있었다. 10년쯤 이어진 두 분의 불화는 이혼으로 마무리되었다. 엄마와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집을 떠났다. 아빠를 이해하면서도 그동안 쌓인 미운 감정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멀어진 가족이었지만 때로 안부 전화를 드리기도 했다. 그것이 도리라고 생각했고, 내 노력만이 흩어진 가족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처럼 느껴졌다.
아빠 역시 피해자임을 안다. 부모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자라지 못한 아빠 역시도 불쌍한 사람이었다. 당신의 아버지에게 인정받기를 바랐지만, 할아버지가 눈 감으실 때까지 그러지 못했다. 자신의 가정을 이루고 자신 방식대로 잘살아 보려 했지만, 조선 시대 유교 사상에 기반된 당신의 사고는 가족에게 빈번히 상처가 되었다. 장남의 아내라는 이유로 엄마는 빚을 내어서라도 제사상을 차려야 했고, 가부장적인 모습에 나는 점점 아빠와 함께 있는 시간이 힘들었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엔 아빠 집을 방문하곤 했었다. 아빠는 그런 나를 반가워했지만, 대화의 끝에는 모든 불행의 원인을 외부로 떠넘기셨다. 내 친구들의 잘잘못엔 쉽게 발끈했지만, 당신과의 대화에선 쉽게 체념했다. 가엽고 안쓰러웠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그동안의 삶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기는커녕 여전히 화살을 외부로 돌리는 당신이 불쌍했다. 아빠와 소통하려 시작한 편지는 끝끝내 답장을 받지 못했다.
당신이 가엽다. 어릴 적 엄마와 동생을 잃고 혼자 친척 집을 하염없이 헤매던 어린 아빠를 안아주고 싶다.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기에 사랑을 줄 수 없던 삶이 가슴 아프다. 당신을 온전히 받아들이진 못하겠지만, 당신을 조금은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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