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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07. 2016

<통 찰>

최재천

<통 찰>  최재천


                       강 일 송


오늘은 과학자이지만 인문학적 지식과 소양이 풍부하여, 자연과 인문의

융합, 통섭에 대한 글을 많이 써오고 있는 최재천교수의 글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최재천(1954~) 교수는 서울대 동물학과를 나온 후, 하버드대학에서 생물학

석사, 박사를 취득하였고,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석좌

교수를 거쳐 현재는 국립생태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통섭의 식탁” 및 “과학자의 서재”, “개미제국의

발견“, ”대담“ 등 여러 저서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의 컬럼 중 세 편 정도를 정리해서 소개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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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성


2006년 3월 16일 시사주간지 “타임”은 21세기가 인류 역사상 가장 대단한

창의와 혁신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옛날 우리의 조상은 날카로운 돌을 주워 동물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고

이내 돌의 면을 날카롭게 만드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우리 인간은 존재 역사 내내 끊임없이 창의와 혁신을 추구하여 왔다.


지금까지 혁신의 주체는 극소수의 천재 또는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주체가 극소수에서 엄청난 다수로 넘어갔다는 것이 “타임”

의 주장이다.   그동안 사람들의 아이디어는 대체로 포장마차에서 술과 함께

사라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든 다듬어진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그걸 구현해주는 메커니즘이 컴퓨터 안에 마련되어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천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창의성은 정의하기 매우 까다로운 개념이다.

타고나는 것인지, 아니면 교육에 의해 길러질 수 있는 것인지를 두고 참으로

많은 논쟁이 있었다.

“아인슈타인 피카소;현대를 만든 두 천재”의 저자 아서 밀러는 창의성이란

통합적 사고와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피카소와 아인슈타인은 각기 예술과 과학이라는 다른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했지만 시각적 상상력에서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들이 천재성을 발휘하기에 이른 과정은 무척 다르다.

이들을 만일 야구선수로 비유한다면 아인슈타인은 타율과는 상관없이 어느

날 드디어 장외홈런을 때린 사람이고, 피카소는 수없이 많은 단타를 치다

보니 심심찮게 홈런도 때렸고 그 중의 몇 개가 만루홈런이 된 것이다.


피카소는 평생 엄청난 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는 평범한

것도 많았으나 워낙 많이 그리다 보니 남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수작을

남기게 된 것이다.


나는 섬광처럼 빛나는 천채성보다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더 소중한 덕목이라

고 생각한다.  기린의 목은 아무리 잡아 늘여도 길어지지 않지만 배움의

키는 끊임없이 큰다.  신기하게도 키는 조금만 커져도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홀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스스로 아인슈타인이 못 된다고

실망하지 말자. 부지런히 뛰다 보면 앞서 가는 피카소의 등이 보일 것이다.



◉ 시 간


장자는 “지북유(知北遊)”편에서 인생의 덧없음이 마치 달리는 흰 망아지를

문틈으로 보는 것과 같다며 “백구지과극(白駒之過隙)”이라 했다.

하지만 옛 사람들은 이와 상관없이 느긋하게 살았던 것 같다.


하루를 넉넉하게 열두 토막으로 나눴다.  그래서 “오시(午時)에 보세”

하면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만나자는 얘기였다.  요즘처럼

그저 5분만 늦었도 닦달하는 게 아니라 한두 시간은 여유롭게 기다려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원래 시간을 지구의 자전에 기반하여 측정하다가 자전 속도의

뷸규칙함을 인식하고 1960년 국제 도량형총회에서 지구의 공전 속도에

기초한 초를 시간의 기본 단위로 채택했다.  그러다가 1967년부터는

세슘 원자가 9,192,631,770번 진동하는 시간을 1초로 정의한 이른바

“원자초”를 세계 각국이 표준시로 쓰고 있다.  이 세슘원자시계는 30만년

에 1초밖에 틀리지 않는 정밀한 시계이다.


하지만 보다 정밀한 시계를 만들려는 인간의 노력은 여전히 진행중인데,

지금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시계는 2012년 2월 미국표준기술연구소가

내놓은 제 2의 “양자논리시계”이다.  알루미늄 원자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오차의 범위가 37억 년에 1초밖에 되지 않는 초정밀 시계이다.


올림픽 경기를 보노라면 1초의 100등분 단위 하나 둘로 메달의 색깔이

바뀐다.   “채근담”에 보면 명나라 학자 홍자성은 “부싯돌 불빛 속에서

일고 짧은 것을 다툰들 그 시간이 길면 얼마나 길겠는가?“라고 물었

다지만, 그때부터 불과 4세기 남짓의 기간에 우리는 이제 부싯돌 불빛도

가늘게 쪼개어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시계가 만일 1초의 100 또는 1000분의 1까지

잰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사실 그 옛날에는

휴대용 시계가 없어서 “오시”를 대충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으로

넉넉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때론 무지가 여유를 허한다.



◉ 고통과 행복


행복은 종종 고통 앞에 무릎을 끓는다.

고통은 철학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이다.  특히 인간 경험의 본질과 흔히

‘감각질’이라고 번역하는 퀼리아(qualia)에 대한 논의의 핵심 요소이다.


데카르트는 동물은 의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미국 수의과대학에서는 1989년까지도 동물의 고통은 일단

무시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제 우리 동물행동학자들은 이 세상 많은

동물들도 나름대로 고통을 느낀다는 걸 충분히 관찰했다.


진화적으로 볼 때 고통은 생물의 삶을 보호해주는 적응 현상이다. 통증을

유발하는 자극은 우리 몸에서 곧바로 반사작용을 일으키고 다시는 그런

위험함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훈련시킨다.

선천적으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태어난 환자는 성냥불에 손가락이 타

들어가도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모른다.


우리는 모두 고통 없는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 그러나 고통이 사라진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삶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고통 없는 세상이 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허구한 날 병원에 누워 있을 것이다.


고통은 분명 소중한 진화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통, 통풍,

루푸스 등 참을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

“자살”을 뒤집으면 “살자”가 되지만, 고통은 아무리 뒤집어도 여전히

통고(痛苦)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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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통섭학자 최재천교수의 컬럼 세 편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컬럼에서 저자는 창의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타임지에서

21세기가 가장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시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합니다.

그러면 22세기는 덜 창의적일까요?  현재까지는 21세기가 그랬다면 앞으로

더 가속도가 붙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그 가속도가 갈수록 무서워지기까지 하는군요.

예전에 100년에 걸쳐 변할 내용이 10년 만에 변하다가, 이제는 1년 만에

변할 수 있고, 만일 매일 변한다면 우리 인간이 그 가속도에 휘둘려 제대로

살아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여튼, 최교수는 천재를 아인슈타인식의 갑자기 나타난 한방 천재와, 피카소식의

무수한 안타와 삼진을 당한 후 만루홈런을 치는 꾸준함의 천재로 나누어

분류를 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 이상의 재능없이 휘두르기만 한다고 홈런이 나오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많은 시도, 즉 배트를 자주 휘둘러야 뭔가를 이룬다는 것은 진리이지

싶습니다.


두 번째 글은 시간에 대한 과거의 인식과 현대의 인식 사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흰망아지가 문틈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을 보는 시간이라고

하는 비유는 퍽이나 재미있습니다. 과거 선인들의 해학적인 성향도 같이

묻어나고 있네요.


촌각의 다투는 시간이나 “오시”라고 뭉뚱거려 시간을 이야기해도 사람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촘촘한 시간의 틈바구니에

나의 삶을 짜맞추어 넣을 필요가 있을까요.


저자의 마지막 말이 명언입니다.

“때론 무지가 여유를 허한다”


세 번째 글은 고통과 행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행복은 고통 앞에 무릎을 꿇는 경우가 많지만, 고통이 없는 상태, 즉 쾌락의

상태가 행복이라는 등식은 맞지 않겠지요.

기원전 쾌락을 최고의 선으로 보았던 에피쿠로스 학파처럼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선이 쾌락일까요?,  물론 여기서의 쾌락은 일시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이

아닌 행복에 가까운 쾌락을 말하지만 말입니다.


행복의 총량을 가지고 인생을 논한다면, 뇌의 쾌락을 관장하는 부위에 전극을

대고, 버튼을 누르면 쾌락을 느끼게 하니까, 하루종일 실험 원숭이가 식음을

전폐하고 버튼만 누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 원숭이의 일생에 버튼을 누른 시간의 총합의 시간이 행복한 일생을 의미

하는 시간일까요?


긴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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