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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Jun 22. 2020

<사소한 것에서 깨달음을 얻다>

“인문학 명강 – 동양고전” 中

<사소한 것에서 깨달음을 얻다>
“인문학 명강 – 동양고전” 中

                                             해 헌 (海 軒)

오늘은 대한민국 대표 인문학자들이 들려주는 인문학 명강의 – 동양고전 편을 한 번
보려고 합니다.
1만 3천 명이 열광한 동양고전 최고의 강의로 플라톤아카데미의 ‘동양고전’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오늘 그중 광고업계의 전설 “박웅현”대표의 강의를 먼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책은 도끼다” 라는 책으로 이미 베스트셀러를 저술한 저자이기도
하고 많은 광고카피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향합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생각이 에너지다”,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 “잘 자 내 꿈 꿔” 등이 그의 작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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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과 서양의 사고 차이

봄에 추사 고택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매화향을 맡았습니다.
그렇게 은은한 향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그다음부터 저는 매화를 찾아다닙니다.
봄이 되면 생명은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밀어 올립니다. 자기의 모든 잠재력을
응축해 놓았다가 며칠 사이에 꽃을 피워 올립니다.
젊었을 때 어른들이 “야! 봄이다. 꽃 보러 가자”라고 말하면 ‘아니, 매년 피는 꽃
가지고 왜 난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꽃이 피는 것이
‘난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꽃이 피는 순간순간의 놀라운 변화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저는 최근에 이런
기적들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여름의 하루를 생각해보면, 낮에는 열기를 내뿜지만
이른 아침에는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고, 저녁에는 바람이 차가워진 것을 느낍니다.
그 뜨거운 태양 속에 가을은 숨겨져 있었습니다. 기적처럼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들을 잡아냈을 때의 짜릿함, 그게 요즘 제가 사는 가장 행복한 포인트입니다.
제가 이런 걸 보게 해준 범인들이 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정도전입니다.
그가 쓴 “창문을 열고 편히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가지 끝에 흰 것 하나 하늘의
뜻을 보이노라.”라는 문장에서 저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늘의 뜻을 알고 싶어서 <주역>을 읽다가 창밖에 시선을 던졌는데, 무심히 올라오는
가지 끝의 흰 것 하나를 보고 하늘의 뜻을 읽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통찰입니다.

서양은 어떤 것을 알기 위해 따집니다. 따지고 알아보고 분석하고 그리하여 기어이
답을 찾아냅니다. 그게 그들의 아주 좋은 장점입니다.
반면, 동양은 어떨까요? 동양에서 분석적인 삶의 태도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철수의 <가을사과>라는 판화에는 동양의 힘인 ‘통찰하는 힘’이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과 떨어지는 것을 그려 놓았는데, 그림 위의 텍스트가 인상적입니다.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
이철수는 논문 50페이지로 얘기할 수 있는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단 세 줄로 끝냈습니다.

물론 지난 200-300년 동안 서양이 인류사를 이끌어 왔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서양 철학을 대표하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진짜 철저한 고독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문명의 이기들 대부분이 그들의 치밀함 덕분에 탄생했습니다.
그들은 논쟁을 합니다. 이성으로 따지는 겁니다.
논쟁은 레토릭(rhetoric) 즉 수사학(修辭學)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반면 사색은 시를 만들어냅니다. 시는 이성적인, 논리적인,
과학적인 분석은 없습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동양을 ‘미스티시즘, Mysticism(신비주의)’
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대만의 현대신유학 분야의 거장인 팡둥메이(方東美)는 제자백가의 사상을 모두 정리해
동양과 서양 사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서양의 철학을 “분석의 철학”
이라 하고, 동양의 철학을 “화해의 철학”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관계론”을 동양사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저 산을 보면
저 산속엔 뭐가 있어?’라고 “존재론”을 펼친 것에 대해 동양 사람들은 ‘저 나무랑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해’라는 걸 먼저 따졌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동양은 자연을 타자화시키지 않습니다. 반면, 서양의 냉정한 분석과 ‘코기토
에르고 숨’은 그것을 타자화시킵니다.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면 자연도 정복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제는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이 융합되어야 하는 시점이 도래했습니다. 동양사상과 서양
사상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우월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프리초 카프라는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에서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을 위해 물러선다.
이제 음이 섞일 때가 됐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 들여다보기, 그 사소함이 주는 깨달음

‘들여다봄’ 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사물을 얼마나 들여다보고 있는가.
과연 우리는 우리 것을 얼마나 들여다보고 있는가, 우리의 것의 힘을 얼마나 보고
있는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유홍준 교수의 <정직한 관객>이라는 오래전에 나온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뉴욕 휘트니 미술관의 선임연구원이자 큐레이터가 우리나라를 방문해 열흘 정도 돌아
보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 전라도에 가서 황토빛 흙을 보는 등 우리 풍경을 두루
봅니다. 마지막 가는 날 감사 인사를 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열흘 동안 엄청난 자극을 받았다. 동양의 이 작은 나라에서 너희가 가지고 있는
너희만의 색깔을 보고 자극을 받고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 한
가지는 ‘그것이 왜 현실에 반영되어 있지 않느냐’ 이게 지난 나의 열흘간의
화두였다. 이제 조금 알겠다. 당신들은 세계화가 되기 위해서 뉴욕을 보고 있는
것 같더라. 세계화가 되고 싶으면 강진 해남의 흙 색깔을 봐라.”

<예기,禮記>에 ‘무불경,毋不敬’ 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세상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존경의 대상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저는
생의 근거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바람 하나도 예민하게 잡으려고 노력하고,
떨어지는 빗줄기 하나도 전부 더 경의를 가지고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길가에 피어오르는 꽃들, 스쳐지나가는 동물을 보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양
무심하게 지나칩니다. 그러나 동물이 아무것도 아니면 저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이것이 말하자면 존재론이고 대화해(大和解)이며 관계론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우리 것을 들여다보면서 우리 것에 대한 존경을 표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정말 경의를 가지고 봐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얼마만큼 들여다보느냐가 오늘날 동양고전이 갖는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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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인문학 대표 학자들이 들려주는 명강의 시간 중 첫 번째로 광고업계의 마이다스
의 손인 박웅현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예전에도 <책은 도끼다>를 통해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저자는 우선 동양적 사고와 서양적 사고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동양은 관계론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서양은 존재론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하지요.
그리고 서양은 분석의 철학이고 동양은 화해의 철학인데, 서양은 존재론적으로 자연을
타자화해서 정복의 대상으로 인식을 합니다. 반면 동양은 관계론적으로 접근하여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생각한다고 하지요.
이러한 차이로 인해 최근 수백 년 간에는 서양의 과학기술의 우위로 근대 문명을 이끌게
된 것을 말하고 있고 근래에 와서 이런 서양 사고의 한계로 인해 자연과 환경의 파괴,
현대문명의 정신적 후퇴 등으로 다시 동양적 사고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저자는 동양사고와 서양사고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융합하고 서로 이해하면서
새로운 통합적 사고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철수 작가가 사과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만유인력 때문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때가
무르익어서 떨어졌다고 표현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의 상황을 보고 완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지요. 저자의 말처럼 이것을 두고 우열을 나누면 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를 뿐이지요. 민주주의에서도 성숙한 의식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현재 미국에서 비롯되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인종차별 금지에 대한 시위나 항의는
이런 밑바탕에서의 다름에 대한 인정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오늘 글의 제목이 “사소한 것에서 깨달음을 얻다”인데, 이는 광고 카피를 창작하는
저자에게는 참으로 필요한 자세일 것입니다. 작고 사소한 것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마음자세와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영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예기>에 나오는 “무불경”의 뜻처럼 세상에는 존중받지 못할 존재는 없다는 것이
큰 깨달음이라 생각합니다.
길가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작은 꽃, 야생에 존재하는 동물들, 자그마한 곤충까지
이 지구의 생태계 내에서 부족하거나 모자란 존재는 없습니다.

또한 미국 휘트니 미술관의 큐레이터 말처럼 진정한 세계화는 진정한 자기 문화에서
비롯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뉴욕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해남의 황토의 빛
에서 진정한 글로벌의 씨앗이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소하고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길 줄 알고, 우리의 것을 아래로 보지 않는 마음이
현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도 소중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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