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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Aug 19. 2020

<시대의 반항아 구스타프 클림트>

“방구석 미술관”中 - 가볍고 편하게 시작하는 교양 미술

<시대의 반항아 구스타프 클림트>
“방구석 미술관”中 - 가볍고 편하게 시작하는 교양 미술

                                      해헌(海軒)

오늘은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고 부담되지 않게 설명해주는 교양
미술서를 한번 보려고 합니다.
그중 “황금빛의 화가”라 불리는 구스타프 클림트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겠
습니다.

저자는 조원재 작가로 미술을 사랑해서 ‘미술관 앞 남자’가 된 분으로
줄여서 ‘미남’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경영학을 전공했으나 미술이 좋아
미술을 독학하였고 유럽 전역을 다니며 미술관을 순례했다고 합니다.
팟캐스트 <방구석 미술관>을 진행하고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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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항아 클림트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찢어지게 가난했는데, 오죽하면 성탄절에도 집에 빵 한 조각이
없었고, 집세를 못 내 열다섯 살까지 다섯 번이나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클림트에게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성공에 대한 끈기와 열정,
그리고 귀금속 세공사였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을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

그는 14세에 오스트리아 최고의 명문 빈 미술공예 학교에 입학하였고
가난 때문에 자퇴하고 미술 교사가 되겠다는 클림트를 교장이 싸고 말리며
장학금을 줬을 정도로 그의 재능은 뛰어났습니다.
클림트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주문을 받아 예술 작품을 만들어주는 ‘예술가
컴퍼니’를 설립하였고 미술공예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친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그리고 프란츠 마치와 함께 말이죠.

클림트의 나이 서른, 성공의 가도를 달리던 그의 삶에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창업 파트너이자 친동생인 에른스트가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한 것입니다.
거기에 아버지까지 같은 증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두 사람의 죽음으로
클림트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림을 그릴 의지도 사업에 대한 열정도
사라져 폐업을 하게 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의 그림 안에는 자신이 없고 철학과 개성이 빠져 있다는 깨달음을
얻고는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놓는 시대의 반항아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지만 그의 반항에는 신사다운 품격이 있었습니다. 반항은 곧 그의
예술이었으니까요. 도대체 그는 어떻게 반항한 것일까요?

★ 고품격 반항 1 ; 분리해 싸워 이긴다.

19세기 말, 빈의 미술을 쥐락펴락했던 것은 ‘빈 미술가협회’였습니다.
이 주류 미술 세력은 매우 보수적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500년간 이어져온 고전적인 양식과 기술이 진리라고 여기며 변화를
거부했죠. 빈의 모든 예술가들은 협회의 구미에 맞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옆 동네 파리에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화가가 자연에서 느낀
인상을 ‘자기 마음대로 그리는’ 인상주의가 탄생해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파리에서는 1890년대부터 ‘새로운 예술을 하자’는 아르누보(Art Nouveau)
운동이 펼쳐졌고, 독일에서도 ‘젊은 예술을 하자’는 유겐트스틸(Jugendstil)
운동이 확산되었죠. 이런 상황에서 빈의 예술은 너무나 시대와 떨어져
있었습니다.

1897년 서른 다섯의 클림트는 빈 미술 권력과의 투쟁을 선포합니다.
그는 뜻을 함께 할 동지를 모읍니다. 그룹명도 주류 미술 세력에서 분리
되겠다는 의지를 담아 ‘분리주의(Secession)’그룹이라고 짓죠.
그들은 <베르 사크룸>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배포하고, 분리주의 전시관
<제체시온>을 빈 도시 한복판에 세웁니다. 또한 분리주의 전시회에서
<팔라스 아테나>라는 걸작을 클림트는 선보입니다.

★ 고품격 반항 2 ; 진실을 벗기다

분리주의 그룹을 통해 반항의 서막을 알린 클림트는 이제 그만의 철학과
개성이 담긴 작품을 창과 방패삼아 굳세게 진격합니다. 고정관념으로
가려져 있던 진실을 밝히면서 말이죠.
그는 ‘벌거벗은 진실’이라는 뜻의 <누다 베리타스>라는 작품을 내놓습니다.
그에게 성욕이란 인간이 가진 너무나 자연스러운 본능이었고, 예술에 진실을
담기로 한 클림트에게 ‘진짜 누드’를 그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였고,
예술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표현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이 철학과 신념으로 이어갔고, 이 투쟁의 과정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키스>, <다나에>, <유디트> 같은 걸작이
탄생하게 됩니다.

★ 고품격 반항 3 ; 학문을 모독하다

이제 빈의 고품격 반항아의 마지막 스캔들을 소개합니다. 클림트는 이제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명문대 빈대학교와의 전투를 준비합니다.
1894년 빈대학교가 대강당을 채울 천장화를 그에게 의뢰를 하였는데
주문한 주제는 철학, 의학, 법학 세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의뢰자의 의도와는 달리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고통과
고뇌에 빠져 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철학을 한들,
결국 고통과 번민 속에 있을 뿐이다. 그것이 진실이다.’라고 말하는 듯
말입니다. 또한 ‘인간이 아무리 의학을 한들, 결코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진실이다.’ 등,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작품들은 심한 사회적 비난과 함께 결국 철수하게 됩니다. 대중과
언론의 오랜 비난이 이어졌습니다. 이 연작들은 2차 세계대전 때
소실이 되었는데 히틀러가 퇴폐미술로 낙인찍어 모두 불태워버렸기
때문입니다.

★ 새로운 예술을 쟁취한 반항아의 끝, Baby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미술 천재 클림트, 고전주의 양식을 따라 그리기만
해도 마음 편히 먹고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타협하지 않고
시대의 반항아로 살았습니다.
예술가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새로운 예술의 시대를 빈에도 꽃피우기
위해, 스스로 황금빛 창을 들고 아테나 여신이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온갖 반발과 저항을 이겨내고, 결국 새로운 예술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의 분리주의 정신은 곧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라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또 다른 거장들을 탄생시키는 인큐베이터가 되었습니다.

반항아 클림트의 마지막 작품은 무엇일까요? 1918년, 그가 뇌졸중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그렸던 <아기(요람)>입니다. 미처 채색도 마치지 못한
부분이 많은 작품입니다. 사실 클림트는 평생 ‘여성’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몰두했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인간은 3단계로 정신이 진화
한다고 말합니다. 1단계는 삶에 놓인 고통이라는 짐을 기꺼이 지고
사막을 걸어갈 수 있는 끈기정신을 가진 ‘낙타’입니다.
2단계는 단순히 고통을 인내하는 것을 넘어 세상의 문제와 맞서 싸우는
투쟁정신을 가진 ‘사자’입니다. 궁극의 3단계는 1,2단계의 정신을 바탕
으로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만들어내는 창조정신을 가진 ‘어린아이’입니다.

클림트는 어땠을까요? 그는 삶의 짐을 기꺼이 지고 고난의 사막을 걸어
갔습니다. 그리고 투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
으로 자신의 삶을 놀이로 승화시켰습니다. 신명나는 놀이 속에서 자신만의
규칙이 살아 숨 쉬는 놀이터를 만들었습니다.

빈 미술계를 테러했던 희대의 반항아 클림트. 그의 요람 속 아기는 혹시
니체가 말하는 ‘어린아이’를 뜻하는 건 아닐까요? 드디어 자신도 낙타와
사자의 단계를 넘어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창조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고
느낀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요람 속 아기는 클림트의 처음이자
마지막 자화상이 아닐는지........ 그 답은 그림 속 아기가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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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현대에 있어 그의 작품들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되어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삶과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았습니다.

클림트는 금세공사였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뛰어난 재능으로 빈의 가장 미술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졸업 후에는 회사를 만들어 성공의 가도를 달립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 이후 그는 그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당시 프랑스와 독일에 비해 보수적이던 빈의 미술계에 풍파를 일으킵니다.

그는 빈 미술가협회에서 떨어져 나와 분리주의 그룹을 이끌면서 새로운
풍조의 그림들을 내보입니다. 팔라스 아테나, 누다 베리타스 등의 작품을 통해
기존의 미술계에 도발을 하였고, 이후 키스, 다나에, 유디트 같은 명작들이
탄생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빈대학교의 대강당에 그릴 천장화의 주제들, 즉, 법학, 의학, 철학
에 대한 그림에서 그의 주장이 상당히 인상깊었는데,
'인간이 아무리 철학을 한들 결국 고통과 번민 속에 있을 뿐이다.'
'인간이 아무리 의학을 한들 결코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진실이다.'
라는 클림트의 주제의식은 상당히 냉철하고 정확하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클림트가 아니었으면 현재 오스트리아 빈에서 고전주의 작품들만 가득한
미술관이 있었을 것이고,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의 귀한
작품들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도 빈의 벨베데르 궁정에서 보았던 클림트의
<키스>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철학자 니체의 인간의 정신적 3단계를 언급하면서 클림트의
유작인 <아기(요람)>을 설명하고 있는데, 니체의 3단계중 <어린아이>
단계가 그의 작품에 있는 아기가 아닐까 말하고 있습니다.
니체의 <어린아이>는 신명나게 놀면서 세상에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천진난만
하게 만들어내는 궁극적 인간의 경지라고 일컫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클림트로 인해 예술적 영감이 가득한 작품들을 마주하게 되었고
새로운 시도는 때로는 어려움에 처할 순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 또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발상, 역발상, 비틀기 발상 등은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더 나은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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