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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04. 2020

<칭기즈칸의 대제국>

“결정적 한마디가 삶의 철학이 된다”中

<칭기즈칸의 대제국>
“결정적 한마디가 삶의 철학이 된다”中

                                    해 헌(海軒)      

오늘은 동서양의 역사 속에서 발자취를 남긴 많은 인물들 중에서 그들이 시대의
험난한 시기를 넘어 역사를 만들었던 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보려고 합니다.
즉, 역사 인물 스토리텔링 교양서라고 저자는 정리를 합니다.

저자인 한수운작가는 국문학을 전공하고, 출판기획과 단행본 집필, 기획번역 등을
해왔고 다양한 집필, 독서낭독, 시민 글쓰기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시간은 위대한 문호 셰익스피어와 서양 철학의 가장 위대한 대부라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와 위대한 천재 괴테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오늘은 칭기즈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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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아시아를 평정하고 서양 정벌로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이루다

“행동의 가치는 그 행동을 끝까지 이루는 데 있다.”
세계 대제국을 이룬 칭기즈칸(1155-1227)이 세계 제패를 위해 초원을 누비며
전장에 나선 병사들의 용맹을 독려하며 한 말이다. 칭기즈칸은 1155년 몽골
고원이 온통 전쟁의 광풍이 휘몰아칠 때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자신이 죽인 적장의 이름을 따서 아이에게 ‘테무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독살당한 후 그의 가족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테무친의 어머니는 몽골 귀족으로서의 긍지를 가지도록 교육하였고 테무친은
17세 때 아버지와 동맹관계에 있던 케레이트 부족의 한 족장 완칸의 신뢰를
얻었다. 그는 완 칸의 원조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아버지의 부하들을 다시
모으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메르키트 부족의 습격을 받아 갓 결혼한 신부 보르테가 납치당했다.
테무친은 복수전을 펼쳐 아내를 구출하고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이때부터 몽골 부족의 지도자들이 테무친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12세기 말에 이르자 테무친을 몽골족의 칸(왕)으로 옹립하게 되었고 테무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206년은 몽골과 세계사에 일대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몽골족은 스텝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전쟁을 치르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가
되어 있었다.
칭기즈칸의 군대는 10진법 체제로 나뉘어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다. 부장들은 칭기즈칸의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는,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 잔인함과 관용의 적절한 운용

칭기즈칸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급속하게 변하는 외부
환경에 잘 적응했다. 처음에 그의 군대는 사료가 필요 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몽골 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군대로는 다른
유목민들은 굴복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몽골족들은 곧 조랑말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군사 전략을 갖추었다.

칭기즈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西夏)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으며 1215년 연경을 함락
시켰다. 더 나아가 호라즘 샤의 정벌에 나섰는데
“항복하는 자는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항복하지 않고 투쟁과 저항으로 맞서는
이들은 전멸시킬 것이다.” 라며, 가는 곳마다 도시를 불태웠고, 주민들은 몰살
되거나, 협력할 경우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각종 혜택을 부여했다.

1226년 서하에 대한 원정을 하였고 이때 사고로 낙마한 뒤 열병을 앓았고
그의 아들들은 원정을 만류하였다. 하지만 그는 원정을 강행했고 결국 서하를
함락시켰다. 이 무렵 칭기즈칸은 죽음을 앞두게 된다.
1227년 그는 눈을 감게 되고, 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서하의 수도 홍경은
함락되었다.

그는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금나라의 성들이 단단하니 남송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해서 남쪽에서 공략하라.”
칭기즈칸의 유언을 충실히 받든 아들들은 황하 이남의 개봉에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금나라를 남송과 함께 공격하였다. 결국 금나라와 남송은 멸망하고
중국 대륙에는 칭기즈칸의 원나라가 들어선다. 또한 그의 후예들은 유럽까지
진출하여 역사상 최강의 정복자의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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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형성한 몽골 제국의 칭기즈칸에 대한 역사
이야기를 함께 보았습니다.

인구가 많지도 않고 유목 밖에 되지 않는 척박한 땅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견디어가며 몽골 고원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자신만의 뛰어난 능력으로 강력한
제국을 만들어냅니다.
처음에는 주위 부족들을 정복하다가 제법 큰 나라들을 하나하나 섭렵해갑니다.
동쪽으로는 중국을 거쳐 고려를 실질적으로 지배했고, 서아시아에서는 그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 도시였다는 바그다드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서유럽 앞쪽
까지 진출을 하여 킵차크 한국을 만들지요.

일반적으로 칭기즈칸에 대한 평가는 과거 역사의 연루에 따라 극과 극의 평가가
이루어지는데, 잔인한 악마와 같은 평가부터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라는 평가
까지요.

그러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조그만 부족 출신의 지도자가 이처럼 전세계를 주름
잡는 제국을 건설했을까요? 먼저 춘추전국시대와 같이 온통 전쟁의 수렁 속에
있었던 시절에 태어나 많은 전쟁 경험과 전술을 가지게 된 것이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 문자는 없었지만 새로 정복한 국가의 기술자들을 우대하여
신기술을 습득하고 이를 응용하여 다음 전쟁터로 나가는 지혜로움이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또한 항거하는 나라는 씨를 말리듯이 잔인하게 대하였고, 항복하면 그들의 종교,
지배체제 등을 인정하는 관용의 정책을 사용했지요.
이미 그 당시에 계급폐지, 종교 자유 보장, 약탈혼 금지, 인종차별 금지 등의
정책이 있었고 인재를 굉장히 중시했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보자면 강한 군사력만 가진 것이 아니라, 출신을 가리지
않는 인재 등용, 종교 자유 보장, 새로운 기술에 대한 높은 수용성, 다른 문화에
대한 폭넓은 관용성 등이 세계를 아우르는 몽골 제국을 건설한 요인이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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