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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Nov 06. 2020

<고려 이야기 – 삼별초 편>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中

<고려 이야기 – 삼별초 편>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中

                                           해헌(海軒)     

오늘은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읽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을 해주고 있는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최용범(1968~) 작가는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를 졸업
하였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습니다. 월간 <사회평론길>에서 취재 기자로
일하다가, 2000년 <월간중앙>에 <역사인물 가상인터뷰>를 연재하면서 역사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합니다. 이미 50만의 독자가 선택한 한국사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를 비롯, <역사인물 인터뷰>, <하룻밤에 읽는 고려사>, <만약에 한국사>,
<난세에 간신이 춤춘다> 등 다수의 책을 집필했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 중 고려의 삼별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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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적을 막는 부대, 삼별초

우리는 대몽항쟁의 상징으로 삼별초를 기억하고 있다. 강화도에서 진도로, 진도에서
제주도로 옮겨가며 3년간 세계 최강의 몽고군에 맞서 항쟁을 전개한 삼별초의 투쟁은
민족적 자긍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삼별초의 실상과 항쟁의 원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우선 삼별초가 어떤 부대인지 살펴보자.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이 세 부대를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처음에는
야별초라고 불렀는데, 애초의 목적은 도적을 막는 것이었다. <고려사>에는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으므로 용사들을 모아 매일 밤 순찰하면서 폭도들을
막게 하고, 이를 야별초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도적과 폭도를 막기 위한
부대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적과 폭도라 하면 무엇을 말하는가? 최고 권력자
최우가 방비를 지시할 정도의 도적과 폭도라니 심상치 않은 세력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세력이란 바로 당시 지배층의 수탈이 극에 달해 유랑하던 백성들이 조직화
돼 항쟁을 전개하던, 지배층에선 초적 산적 화적이라 부른 봉기 세력이었다.
그러니까 야별초는 지배층의 명을 받아 민중항쟁을 진압하던 정권 유지 세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일반적인 군사 기구의 병사보다 좋은 대접을 받았다.
문제는 정작 강화도 방어 외에는 제대로 투입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태생이
정권 유지 세력이었던 만큼 삼별초의 활동은 철저히 최씨 정권의 수호에만 활용
되었고 강화도 밖의 몽고와의 본격적인 전투는 그다지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 그래도 몽고에 항복한 고려 조정보다는 낫다

삼별초군이 강화도를 벗어나 항쟁에 나선 시기는 1270년부터였다. 시작은
강화도였다. 1270년은 문신 세력과 원종이 하나가 돼 원에 항복하고 강화도를
떠난 시점이었다. 무신정권은 항복을 거부하고 강화도에서 삼별초군을 이끌고
농성하다 끝내 내부의 정변을 만나 붕괴되었다. 무신정권의 항몽의지가 그만큼
굳어서가 아니라, 원과의 강화가 무신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몰락과 보복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런 무신정권이 붕괴되자, 그들의 무력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배중손이 주축이 된 반란군은 왕족인 승화후 온(溫)을 왕으로 추대해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반몽고와 반정부를 내세운 이들은 강화도를 근거지로
삼기에는 힘들다고 판단하여, 배 천여 척을 동원해 진도로 옮겨가 거점을 쌓았다.
그리고 진도와 제주도를 중심으로 전주, 나주 등의 전라도 지역과 거제도, 마산,
김해, 동래 등의 경상도 일원을 장악했다. 나아가 인천 근방까지 진출해 개경의
고려 정부로 들어가는 조운로(漕運路)를 가로막았다. 조운로란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운반하는 길이었으니 고려 정부가 애를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과 동남아를 연결하는 해상지역에 세력을 확보해 한때 큰 위세를
떨치기도 했다. 최근 발견된 자료에는 삼별초가 일본에 외교문서를 보내
연합작전을 시도한 흔적까지 나온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의 대규모 부대는 진도를 공략해 삼별초군을 대파하고 장군
배중손과 승화후 온을 죽였다. 남은 군사들이 제주도로 내려가 본토를 공격
하고 조운로를 차단하는 등 항쟁을 계속했지만, 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삼별초 항쟁은 위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배층 내부의 정쟁에서 패한 뒤
보복이 두려워 봉기했던 삼별초가 위대했던 것은 아니다. 삼별초가 끝까지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싸움을 같이 해나가고 후방에서 지원한
백성들의 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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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01년에 초판이 나왔고 그동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다가 개정증보판
으로 나온 책을 함께 보았습니다.
역사이야기는 늘 흥미롭고, 저자의 책 중 <만약에 한국사>처럼 IF를 넣어 역사를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그 흥미는 배가될 것입니다.

오늘은 고려사 중에서 항몽으로 유명한 “삼별초”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네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등 3개의 부대를 합쳐 명명하고 있는 이 이름은 그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였던 몽고군에 항거한 세력으로 아직까지 내려오고 있고
제주도의 길을 가다보면 삼별초 유적지에 대한 팻말이 보이곤 합니다.

저자가 언급하였듯이, 삼별초는 본래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 역할을 하였던
집단인데, 원나라에 의해 몰락할 것을 예상하여 항거를 벌이게 됩니다.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이어진 항거는 1273년 4월 여몽연합군에 의해 지도자
인 김통정이 자결하고 남은 1300명은 포로가 되면서 종결이 됩니다.
저자는 이러한 역사에서 외부의 강국에 순응하여 항복한 왕실과 조정에 비하여
끝까지 저항하고 싸웠던 점이 훌륭하고, 이러한 후면에는 일반 백성, 민중의
지지와 힘이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역사는 늘 흥미로운 뒷이야기도 존재하는 법인데, 살아남은 삼별초 중
일부가 한을 품은 채 남쪽으로 떠나 700km 이상 떨어진 오키나와에 도착을
했다는 설이 있었습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주장이 역사학과 교수에 의해서
발표가 되었는데, 오키나와 본섬 등에서 출토된 기와가 삼별초 세력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오키나와 성에서 발견된 기와에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는
글이 쓰여져 있었고, 1273년이 계유년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조선인이 유구 열도(오키나와)에 표류했다가 송환한 경우가 태조부터
명종시대(1546년)까지 13건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실제 표류한 사례는 더 많았을 것으로 사료되고, 3일만에 도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오키나와가 삼별초가 도착하였을 무렵으로 생각되는 시기부터
농경이 본격화되고 인구가 늘어나면 큰 성이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아직 정확하게 고증이 된 내용은 아니지만 몽고의 침입부터 시작이 된
역사 이야기는 저 멀리 오키나와까지 이어지게 되지요.
다음 시간에 다른 내용으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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